“여보 나 전쟁 중이야”···재취업이 어려운 이유

2025-10-10

※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웹툰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만 소비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을 느낄 때가 없던가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읽을거리가 더해진다면 훨씬 더 재밌을 지 모릅니다. ‘일타쌍피 스토리노믹스’는 이야기에 플러스 알파를 더하는 경제인문학 콘텐츠입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와 히스테리시스 효과

잔디깔린 정원이 있는 2층 내 집을 마련했다. 25년째 근무한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직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두 명의 아이들, 한 마리의 반려견,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옆에 있다. 회사가 선물로 보내온 장어로 바베큐 해먹는 날, 가족들을 끌어안은 만수는 하늘을 보며 독백한다. “다 이뤘다”

블랙유머의 대가, 박찬욱 감독이 영화를 이런 식으로 끌어갈리가 없다. 최고의 행복한 순간은 최악의 불행을 위한 밑밥이라는 것 쯤은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다.

만수는 돌연 해고를 통보받는다. 자신이 몸담은 ‘태양제지’가 인수합병됐다. “미국에서는 해고를 도끼질한다, 그런다면서요. 한국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너 모가지야” 만수는 노조를 조직해 구조조정을 막아보려하지만 외국계 경영인들이 받아들일리 없다. 결국 목이 잘려가는 충격을 받은 만수. 하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석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취직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평생 해온 일은 제지업. 하지만 불황에 빠진 제지산업은 이제 있는 사람도 더 해고해야할 판이다. 그때 불연듯 떠오르는 생각 하나. 나를 위한 자리가 없다면 그 자리를 만들면 될 것이 아닌가. 또다른 제지업체 ‘문제지’에 근무하는 반장이 사라진다면 그 자리는 내 자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 그 전에 재취업을 시도하는 다른 베테랑이 있는가 살펴봐야 한다. 이들 또한 만수의 잠재적인 경쟁자다. 만수가 말한다. “당신이 사라져야. 내가 살아”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원작은 도널드 E.웨스트레이크의 소설 다. 박찬욱의 손을 지나면서 강렬한 미장센과 시각적 스타일, 심미적인 폭력, 블랙유머, 스릴러와 호러를 오가는 구성 등이 덧입혀졌다.

실직은 만수의 잘못이 아니다. 만수가 일을 못해서 잘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종이의 수요가 줄었다. 자동화 공정이 도입되면서 일거리도 점점 줄고 있다. 회사는 비용절감을 위해 인력감축에 나서고 그 과정에서 해고가 이뤄진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회사경영진의 말을 끝으로 만수는 실직자가 됐다.

만수가 호언한데로 석달안에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까.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만수는 실직자다. 아내는 “괜찮아. 언젠가 취직되겠지”라며 만수를 달래주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만수는 초조해질 뿐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취미생활과 학원을 끊었고, 대출이자를 내지 못한 집은 팔리기 직전이다.

무엇보다 만수가 걱정하는 것은 히스테리시스 효과 (Hysteresis Effect)다. 히스테리시스 효과란 외부 자극이 사라져도 시스템이 곧바로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의 영향이 남아 일정 기간 지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력효과’라고도 부른다. 고용분야에서는 한 번 실업 상태에 빠지면, 노동시장 복귀가 어려워지는 현상을 뜻한다. 실직기간이 길면 길 수록 자신이 가졌던 기술과 경험이 더 낡아져 취업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히스테리시스 효과는 과학에서 나온 용어다. 히스테리시스는 지연 또는 지속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영국의 물리학자 알프레드 유잉(Alfred Ewing)은 금속자기 성질을 연구하면서 쇠에 자기장을 가하면 자성을 띄는데, 일정한 시간 뒤 자기장을 제거해도 자석성질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히스테리시스 효과’라 명명했다. 한번 찌그러진 깡통을 완벽하게 다시 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경제학이 히스테리시스 효과를 주목하게 된 것은 1980년대다. 미국 경제학자 올리비에 블랑샤르와 로렌스 서머스는 1986년 논문 ‘히스테리시스와 유럽실업문제’를 통해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유럽이 침체에 빠지며 실직이 많아졌는데, 이후 경기가 회복되도 고용률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들은 그 이유로 경기침체가 발생하면 직장에서 해고된 외부인과 직장에서 살아남은 내부인이 발생하는데, 경기가 회복된 이후 내부인들은 높은 임금을 유지하려 해 외부인들이 이때문에 재취업이 어려워 지고, 그 결과로 경기가 회복되어도 이전의 실업률로 회복되지않는다고 설명했다.

플라자합의에도 미국의 무역적자는 계속 됐다

대규모 무역적자를 축소하기 위해 미국이 밀어부쳤던 플라자합의도 종종 히스테리시스 효과의 사례로 인용된다. 미국은 수출을 늘리고 수입은 줄이기 위해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달러화 가치를 절하했다. 마침내 미 달러화가 대폭 절하됐지만, 무역수지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이미 자동차, 철강, 전자 등에서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하락해 일본, 독일 등과 경쟁하기 힘들었고, 계속된 수입이 불가피했다. 여기에 원유 등 원자재 수입가격이 뛰면서 무역수지 적자폭은 큰 개선이 없었다. 무역수지 흑자구조가 한번 깨지고 나니 다시 과거처럼 돌아가기가 어려워 진 것이다.

이처럼 히스테리시스 효과는 과거의 경제 충격이 사라지지 않고 국내총생산(GDP)과 고용 등 경제지표에 계속 부정적 영향을 주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로 정착됐다. 코로나19 당시 백신이 개발되더라도 경제가 과거의 경로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면서 히스테리시스 효과가 부각되기도 했다.

실업기간이 1년이 넘어서자 만수는 극단적인 결심을 한다. 제지회사 문제지의 최선출 반장은 “거긴 이제 젊은 사람만 뽑아. 나이도 있고, 기계도 많이 바뀌었어. 네가 거기 들어가긴 힘들 거야”라며 이력서를 내민 만수에게 손사레를 친다. 하지만 만수의 진짜 카드는 따로 있다.

“실직 당한 후 어떻게 하는 지가 중요해!”

마침내 제지회사 ‘문제지’에 입사한 만수. 회사는 인공지능(AI) 로봇에 의해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다. 더는 숙련된 작업자가 쇠막대기로 프레스롤을 치며 제지의 상태를 확인하는 시대가 아니다. “실직당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직당한 후에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한 거야.” 인간경쟁자를 물리친 만수는 비로소 승전가를 부른다. 자신의 지략으로 히스테리시스 효과를 극복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로봇에 둘러싸인 유일무이한 인간 노동자인 그는 과연 퇴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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