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기업의인권・환경 실사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이 법안에 따르면 500명이상의 상시 근로자를 고용하거나 연매출액 2000억 원이상인 기업은 매년 1회이상 자사, 자회사, 공급망 전체를 대상으로인권・환경 실사를 수행해야 한다. 기업이 실사 의무를이행하지 않으면이해관계자의 신청 또는 행정청 직권으로 시정명령이 부과되거나 과태료 처분을 받을 수 있고, 시정명령을 불이행하면 5년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유럽연합에이어 우리나라에서도인권・환경 실사법 제정이 논의되면서인권경영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인권 실사는인권경영의 핵심 요소로서 기업 경영상 발생했거나 발생 가능한 제반인권 리스크를 식별하여 대응 조치를 취하는 절차이다. 지금까지 국내 여러 기업들은 인권 실사 또는인권영향평가를 실시하고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관련 내용을 공시해왔다. 하지만 인권 실사를 통해 기업의인권경영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대답하기에 주저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하에서는 바람직한 인권 실사를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할 몇 가지를 쟁점을 살펴본다.
첫째,인권실사는 ‘예방적’ 성격의 절차임에 유의해야 한다. 인권 실사라고 하면 인권침해를 유발한 가해자 등을 현장 감사를 통해 사후 적발해 징계하는 절차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국제사회에서 말하는 인권 실사(Human Rights Due Diligence)는, 잠재적인권 리스크를 전반적으로 확인하고 그것이 실제 인권침해로이어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인권 실사의 사전예방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정책・조치・관행 등을 두루 살피며인권 사각지대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런데 현업 담당자에게 인권 실사 체크리스트를 제공하고 개별 평가지표에 예/보완필요/아니요 등으로 답변하도록 하면, 회사의 정책이일부 미비하더라도 ‘예’라고 답변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이 속한 부서의 잘못을 들추어 추궁당하는 상황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타 부서 또는 타 계열사와의 평가 결과 비교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이렇게 하면 수면 아래에 잠재된인권 리스크를 식별하기 어렵다. 경영진과 현업 부서에인권실사의 목적을 명확히 설명하고,인권 리스크를 좀 더 많이 식별할 수 있도록 유인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인권 실사 절차에취약그룹의 참여가 필요하다. 인권 실사의 성공 여부는인권에 취약한이해관계자들이 얼마나 참여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지금까지 수백 명과 인권 실사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대기업의 정규직 중년 남성으로부터인권 리스크가 식별된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인권 리스크는 비정규직, 임신・양육기여성, 장애인, 외국인, 고위험 직무종사자, 비조합원, 하청직원 등취약그룹에서 식별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이들은 회사에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상당히 조심스러워하며, 숫자도 상대적으로 소수이기에 인터뷰 진술의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을 수 있다. 회사는 누구를취약그룹으로 정의하고 의견을 들어볼 것인지,취약그룹의 참여 장벽이 무엇이며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적극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CSDDD 제13조제5항).
셋째,취약그룹의 의견에 온정적으로 접근해 대응 조치를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취약그룹 인터뷰에서 청취한 내용을 회사에 전달하면 그 의견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다만이러한 사실 확인에 지나치게 엄격한 수준의 증빙을 요구하면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취약그룹의이슈는 특수하기에 진술자가 특정되거나 진술자를 특정하려는 시도가 생길 수 있고, 진술 내용의 신빙성을 제3자를 통해 확인하는 과정에서 원 진술이 왜곡되거나 2차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물론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절차는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중대한 실제적 법 위반 등이 아닌 잠재적 리스크 단계의 정황에 대해서는, 회사가취약그룹의 진술을 선의로 해석하려고 노력하면서 예방 및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인권실사의 취지에 더 부합할 수 있다.
한국의인권경영은 한 단계 도약의 시기를 앞두고 있는 듯하다. 일부경영진과 책임자는 회사의인권정책을 다듬는 것을 넘어 실제 구성원과이해관계자들의인권 수준을 정확히 측정해 개선하는 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내외 경영 환경이 녹록치 않지만, 좋은 기업을 만들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은 사람의 본성인 듯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여러이해관계자를 포용하면서 인권 실사를 진행하되취약그룹과 회사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작은 성과들을 하나씩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이 축적될 때인권실사는 단발성 또는 형식적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기업의 지속가능한 위험관리 시스템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