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감나는 적’을 찾아서

2025-10-28

모든 시대에는 경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선을 긋고, 안과 밖을 나눈다. 선을 긋는 행위는 언제나 단순하고, 그 단순함은 안도감을 준다. 선이 명확할수록 안쪽은 더 안전해 보인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정치적 상상력은 언제나 “경계가 분명한 공동체(bounded community)”를 향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공동체는 위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안쪽의 질서를 지키려면, 언제나 바깥의 혼란이 필요하다. 적이 사라지는 순간, 내부의 결속도 함께 무너진다. 그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적이 사라지면, 새로운 적을 찾아 나선다. 마치 사라진 신을 대신해 새로운 신을 만드는 신학자처럼. 의도라기보다 습관이며, 습관이라기보다 거의 반사에 가깝다. 인류의 오래된 방어기제가 정치의 본능으로 굳어진 셈이다.

냉전의 시절, 그 적은 분명했다. 북한이었다. 반공은 신앙이었고, 신앙에는 어둠이 필요했다. 그 어둠이 체제를 비춰주는 등불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 빛은 희미해졌다. 젊은 세대에게 북한은 더 이상 실감나는 공포가 아니다. 북한의 안보적 위험이 줄어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북한의 한국정치적 효용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뉴스 속 숫자, 교과서의 낡은 단어, 인터넷 밈의 소재로만 남았다. ‘실감나지 않는 적’이 된 것이다. 그런 ‘적’은 더 이상 정치를 움직이지 않는다.

본능적 더듬이는 즉각 발동했다. 시선은 북쪽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이번엔 이념이 아니라 문명이다. 이념의 향기를 남기되, 정치·경제·문화를 버무렸다. “전체주의적 중국 대 자유로운 한국.” 간단하고, 강렬하고, 무엇보다 익숙하다. 한국을 공산화하려 했던 기억과 “짱깨”라는 은폐된 문화적 우월감이 절묘하게 섞였다. 중국은 이제 선거판을 흔들고, 인해전술처럼 몰려오는 관광객으로 재해석된다.

그러나 정치의 연극은 오래가지 못한다. 무대의 조명이 너무 밝아지면, 관객은 세트의 허술함을 알아차린다. 중국은 너무 크고, 너무 가까워졌다. 수출도, 관광도, 문화도, 심지어 인구 구조까지 이미 얽혀 있다. 너무 거대한 적은 두렵지만, 정치적으로는 쓸모가 없다. 적은 실감나야 한다. 마을 뒷산을 오르며 적과의 한판 결투를 준비하는 자가 에베레스트산을 적으로 삼을 순 없다. 적은 반드시 손에 잡혀야 한다. 적어도, 그런 상상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면 다음은 어디일까. 혹여 시선이 안으로, 그리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까. 거리의 식당, 공사장, 양계장, 물류창고.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다. 그들은 낯선 언어로 주문을 받고, 낯선 이름으로 서명한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존재는 언제나 안과 밖 사이에 있다. ‘안의 타자’, 정치가 가장 사랑하는 재료다. 그들은 외부인이면서 내부에 있다. 손에 닿고, 눈에 보인다. 이보다 더 ‘실감나는 적’은 없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영국의 브렉시트 캠페인은 “폴란드인이 당신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문장 하나로 불안을 조직했다. 미국의 트럼프는 ‘남쪽 국경’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만들었다. 스웨덴과 프랑스에서는 난민이 ‘안보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불안의 방향이 바깥에서 아래로 향하는 순간, 사회는 도덕적 근육을 잃는다. 더 이상 약자를 돌보는 힘이 아니라, 약자를 찾아 응징하는 힘만 남는다. 불안은 언제나 아래로 흐른다. 물처럼, 중력처럼. 그리고 그 아래에는 언제나 노동이 있다.

한국의 산업은 여전히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그림자 속에 있다. 그 토대를 지탱하는 손들이 바로 그들이다. 필요하지만 불편한 공존. 그런 불편함이 혐오로 바뀌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는다. 혐오의 언어는 언제나 간단하다. “우리의 일자리를 뺏는다.” 하지만 묘한 일이다. 그들이 떠나면, 그 일자리는 비어버린다. 아무도 가지 않는다. 적은 필요하지만, 노동은 원치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이단은 신앙의 그림자”라고 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적은 공동체의 그림자다. 그림자가 짙다는 건, 빛이 불안정하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림자의 형태는 우리가 다시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일 테다. 마치 오래된 집이 제 기둥을 태워 겨울을 버티듯이.

‘실감나는 적’을 만들어야만 따뜻해지는 집. 그 집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 그 마지막 순간에, 그 집 안에는 아무 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다만 벽에 비친 희미한 그림자 하나. 그것이 실은 우리의 얼굴이었음을.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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