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 힘들어하는 이에게

2025-10-23

오랫동안 노력했고 간절히 바랐던 일들이 삽시간에 무너져내리는 것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도 했겠지만,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마음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습니다. 순조로워 보였는데,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원하던 결과가 이제야 손에 잡힐 듯했는데. 그간의 시간과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견디기 어려운 절망감으로 이어집니다.

부정 감정 커지면 시야 좁아져

액땜했다 치고 새로운 길 떠나

예상 못한 인연과 경험 맞아야

내가 겪은 실패도, 다시 처음부터 뭔가를 시작해야 하는 이 상황도,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려는 자신의 결심도, 모두 싫습니다. 타인과 세상도 원망스러워 차츰 말문을 닫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시도는 멈추고,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온통 뒤덮습니다. 이럴 때 드라마에서처럼 큰 실패나 위기를 극복해 기회로 만드는 것은 아쉽게도 일반적인 일은 아닙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의 시야를 더욱 좁혀버리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바버라 프레드릭슨(Barbara L. Fredrickson)의 확장-구축 이론(Broaden-and-Build Theory)입니다.

이 영향력 있는 이론은, 긍정 감정은 우리 시야를 넓히지만 부정 감정은 그 반대의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감정이 커져 있을 땐 나무보다 숲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하려 하고, 새롭고 유연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반면, 부정적인 감정이 커져 있을 땐 (숲이나 나무는커녕) 풀뿌리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습니다. 지엽적인 부분에만 몰두하느라 전체 흐름을 자꾸 놓치게 됩니다. 나의 세상이 점점 좁아집니다.

실패를 경험한 직후라면 마음 안에 부정적 감정들이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당분간은 그 감정들을 알아 봐주고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가 원치 않게 길어지고 짙어진다면, 수많은 기회를 그대로 흘려보내게 됩니다. 이때엔 조금 다른 시도를 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치료 기법 중 ‘10년 후, 지금을 돌아보기’ 질문이 있습니다. 잠시 함께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분께서는 10년 후 나이가 어떻게 되실까요? 그때의 나이에서 지금을 돌아볼 겁니다. 잠시 시간을 들여 이 세 문장을 완성해보세요.

①나는 ○○○을(를) 생각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②나는 ○○○을 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③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내가 달리 행동하고 싶은 것은 ○○○.

나의 시간을 어디에 더 사용해야 할지 이제 머릿속에 그 지도가 그려집니다. 생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이런 간단한 질문만으로도 각자의 지도가 그려지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사실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정 감정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기를. 직접 행동하며 다시 긍정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를. 더욱이, 비록 실패에 이르렀지만 내가 지나온 모든 과정들 역시 나의 머릿속에 굉장한 지도를 남겨두었습니다. 내가 그 시간 동안 해 온 문제 해결의 과정들이, 고통을 감내하고 마음을 다스리려 했던 그 모든 시도들이 내 뇌의 배선을 바꿔두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실패의 고통으로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감정을 일순간 낮출 수 있는 마법 같은 단어가 있습니다. ‘액땜’.

‘액땜한 거야. 액땜했다 쳐.’ 저는 이 표현을 들을 때마다 감탄합니다. 입 밖에 내는 순간 이렇게나 신속하게 치료적인 단어가 또 있을까. 이만큼이나 간단하게 우리 마음을 단단하고도 침착하게 만드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 일이 순조롭게 잘 되었다면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잖아. 지금 실패한 게 나은 것일 수도 있어’ 하며 가볍게 정신승리 해주세요. 실패 경험을 지나치게 이상화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저 그 실패가 마음에 끼치는 영향력을 ‘무효화’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대했던 일들이 눈앞에서 좌절되었다고 너무 오래는 슬퍼 마세요. ‘이렇게 액땜한 거지!’ 하고 호기롭게 큰소리 한번 치고는 다시 행동을 개시하세요. 10년 후, 후회하지 않을 행동을 하세요. 내가 그동안 쌓은 덕이 있어, 내가 너무나 열심히 살았어서, 운명을 관장하는 신께서 팔꿈치로 나의 옆구리를 은근하게 밀었다 생각해주세요. 그렇게 내가 잘못 가려던 방향을 옳게 틀었다 믿으세요. 왜냐하면, 정말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으니까.

옳게 틀어진 방향에서, 새로운 지도를 들고,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만나고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세요. 빛나는 숲을 눈에 가득 차게 담으세요. 그제서야 떠올리시겠죠. 이곳에 오기 위해서였구나. 그때 내가 실패한 것은.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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