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직한 직선과 절제된 형태가 인상적인 나무 의자 여러 개가 전시장 곳곳에 놓였다. 불필요한 장식 없이 직선과 직각, 목재의 결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의자는 미국 미니멀리즘 거장 도널드 저드(1928~1994)가 디자인한 가구다. 회화도 조각도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는 ‘3차원 오브제’의 개념을 제시하며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저드는 자신의 공간을 위해 직접 가구를 설계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저드가 만든 책상과 의자, 침대는 그의 예술과도 닮아 있어 흥미롭다. 의자만 해도 높이와 부피가 같아 언뜻 동일해 보이지만 다리의 형태나 구조가 제각각이다. 아이디어의 반복과 변주라는 저드의 예술적 특징이 가구에서도 드러나는 셈이다. 목재와 금속 등 소재 본연이 가진 물성을 중요시하는 예술가의 고집과 엄격한 미학도 이 일상 속 오브제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현대카드가 27일부터 서울 이태원의 전시·문화 공간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개막하는 ‘도널드 저드 : 퍼니처’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인 저드의 가구 디자이너적 면모를 들여다보는 전시다. 저드가 직접 디자인한 가구 38점을 비롯해 가구의 설계도 역할을 한 드로잉 22점, 특유의 구조와 색채가 인상적인 판화 작업 37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저드의 가구를 중심으로 한 국내 첫 전시이자 지금까지 국내에서 열린 작가의 전시 중 최대 규모이다. 2개 층, 총 4개의 공간으로 구분된 전시에는 1970~1990년대 저드가 나무·금속·합판으로 만들었던 다양한 가구가 자리했다. 작가가 생전 생활하고 작업했던 공간을 떠올리도록 가구와 작품을 배치함으로써 삶과 예술의 관계를 경험하게 이끈다.


저드가 가구 디자인을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고 본격화한 것은 뉴욕과 텍사스 마파를 오고가기 시작한 1977년부터로 알려졌다. 산업 재료로 만든 직육면체를 벽이나 바닥에 설치하는 ‘박스(Box)’ 연작과 벽면에 수직으로 쌓아올리는 ‘스택(Stack)’ 연작 등으로 1960년대 후반 미니멀리즘의 핵심 작가로 떠오른 이후다. 예술가로 확고한 지위를 쌓아 올린 작가가 가구로 영역을 확장한 것은 온전히 실용적인 이유였다고 한다. 26일 열린 프리뷰에 참석한 저드의 아들이자 저드재단의 아티스틱 디렉터인 플래빈 저드는 “당시 텍사스 마파는 괜찮은 가구를 파는 지역이 전혀 아니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웃었다. 그는 이어 “저드는 예술가로 자리 잡은 시점에 가구를 시작했지만 가구로 예술을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며 “가구는 예술과 달리 쓰임이 분명하고 기능적이어야 한다는 점, 디자인적 변주를 더한다고 해서 의자가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거장의 예술과 가구는 여러 모로 닮아 보이는데 저드 디렉터는 “같은 철학이 공유됐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는 “예술이든 가구든 명료하고 정직해야 하며 새로운 것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저드의 철학”이라며 “또 작품·건물·가구 등 어떤 형태든 간에 기본에서 출발해 환경에 따라 계속 변주해나가는 것이 저드의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전시장의 가구들은 저마다 닮아 보이지만 정작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저드 디렉터는 “디자인의 큰 틀은 1980년대 이후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소재와 아이디어에 대한 실험은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시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드는 가구의 품질을 타협하지 않기 위해 생전 디자인의 핵심이 되는 가구의 치수와 재료, 마감, 구조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해뒀다고 한다. 저드 디렉터는 “아버지는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단 한 번뿐인 짧은 생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모든 측면에서 품질을 중시했다”고 전했다. 전시는 내년 4월 26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