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딸이 말하더라고요. 나쁜 남자 조심하라고.” 최근 서울에서 열린 홀몸 어르신 짝찾기 행사에서 한 70대 참가자가 기자에게 이렇게 귓속말했다. 딸은 엄마의 새로운 만남을 응원하며 행사장까지 태워주면서 ‘남자 조심’ 당부를 잊지 않았다.
통계청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은 65세 이상이다. 이들 중 가장 흔한 가구 형태는 1인 가구(37.8%), 그중 상당수가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다. 2050년이면 65세 이상 비율이 전체 인구의 40%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다. 고령화가 심해질수록, 황혼의 사랑은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챕터에서 우리는 어떤 사랑을 그릴까. ‘나는 솔로’의 시니어 버전이라 불리는 ‘종로 굿라이프 챌린지’ 행사에서 은빛 로맨스의 시작을 엿봤다.
가을 햇살이 한옥마당에 내려앉은 지난 21일 오후 서울돈화문국악당에 홀몸 어르신 36명이 둘러앉았다. 불미스러운 ‘상황’을 막기 위해 종로구청에서 직접 65세 이상 남녀 각 18명의 법적 신분을 확인했다. 반짝이는 구두에 깔끔한 정장과 중절모까지 갖춰 입은 신사들과 뽀얗게 화장을 하고 스카프로 멋을 낸 은발의 숙녀들이 마주했다. 가슴엔 본명 대신 개성을 담은 ‘닉네임’ 이름표를 달았다. 남자들은 최불암, 필승, 라보트 등 ‘테토남’ 스타일부터 봉선화연정, 노을, 초원 등 ‘에겐남’ 느낌까지 다양한 닉네임을 선택했다. 여자들은 노란장미, 수선화, 라일락, 목련 등 꽃 이름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다람쥐, 꾀꼬리처럼 귀여운 동물과 로사, 한나, 마리아, 스테파나처럼 가톨릭 세례명도 여성 별칭으로 인기가 많았다.

참가자들의 표정에선 설렘과 긴장이 교차했다. 단체 미팅 분위기에 어색해하며 좀처럼 자리에 앉지 못하던 마리아(82)는 “36살에 남편이 떠나고 아이 4명을 혼자 키웠다”며 “71살까지 일하느라 친구를 사귈 생각조차 못해봤는데, 동사무소에서 친구를 찾아준다고 해 참석했다”고 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더 늦기 전에 짝을 찾아 나선 참가자도 있었다. 라일락(72)은 “혼기를 놓쳐 지금까지 싱글로 살아왔다”며 “아직도 짝을 못 찾은 게 창피하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나오니까 ‘여왕’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초면인 어르신들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흐른 것도 잠시, 어르신 동아리의 합창과 국악 공연이 이어지며 금세 분위기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사회를 맡은 개그맨 심현섭은 “나도 올해 55살에 종로에서 결혼했다”며 자연스럽게 인연의 장을 열었다.

각양각색 캐릭터를 관찰할 수 있는 TV 프로그램 <나는 솔로>처럼 이날 행사에서도 다양한 성격의 ‘어르신 솔로’ 유형을 엿볼 수 있었다. 영호처럼 활발한 성격의 분위기 메이커는 자기소개 시간부터 시선을 끌었다. ‘정열의 레드’로 정장과 중절모까지 ‘깔맞춤’한 정담(78)은 자기소개 대신 노래 한 곡조를 뽑으며 눈도장을 찍었다. 여러 여성을 맘에 두고 갈팡질팡하는 캐릭터도 있었다. 일대일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자 추억(82)은 “세 명이 마음에 든다”며 “누굴 고를지 모르겠다”면서 홀로 애를 태웠다. ‘풀악셀 직진남’ 스타일의 영철 캐릭터는 짝을 얻을 확률이 높았다. 노을(81)은 일대일 선택 시간이 되자마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맘에 드는 여성 북촌(68) 앞에 앉았다. 다른 남성이 북촌 앞을 서성였지만, 노을은 자리를 지키며 사랑을 사수했다. 초원(68) 또한 순정남 행보로 사랑을 쟁취했다. 그는 인기녀 똑순이(73) 옆에 다른 남성이 앉았음에도 삼각 구도로 자리를 차지하고 당당하게 마음을 어필했다. 다른 이성을 한 번 더 선택할 기회가 왔지만, 초원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초원은 “한 사람에게만 마음이 간다”며 집중했다.
짝 찾기에 대체로 적극적인 남성 참가자들과 달리 여성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라일락은 “남자친구를 찾는 데 마음이 열려 있지만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며 “여기서 이성 친구보다 맘이 맞는 동성 친구를 알게 돼 연락처를 교환했다”고 했다. 한평생 가족 뒤치다꺼리를 하다 이제야 돌봄노동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다시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는 것을 꺼렸다. 목련(79)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젊을 때 느끼던 설렘 같은 건 덜하다”며 “좋은 이성 친구를 만나면 좋지만,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 혼자 사는 게 좋다”고 했다. 수선화(81)는 “인연이 되면 가끔 만나서 맛있는 것 먹고 같이 여행 다니고 싶다”며 가벼운 만남을 원했다. 반면 일부 남성들은 새로운 짝을 만나 함께 살며 돌봄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한 남성 참가자는 “자식 손주까지 다 외국에 나가 있어서 상대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우리 집에서 같이 살고 싶다”며 “지난번에 몸살감기로 고생했는데 물 한 잔 떠주는 이 없더라”고 혼자 사는 서러움을 슬쩍 토로했다.

<나는 솔로> 영숙처럼 똑 부러진 캐릭터도 보였다. 북촌은 맘에 들지 않는 남성이 다가오자 ‘철벽차단’했다. 그는 “나와 너무 안 맞는 것 같아서 차버렸다”며 확고한 취향을 드러냈다. 솔직하게 의견을 드러내는 순자 같은 캐릭터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한 여성 참가자(71)는 “남자들이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인다”며 “로맨스 그레이를 기대하고 왔는데, 술꾼 같은 인상의 참가자도 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은 회색빛으로 물들었을지언정, 세월의 멋을 품은 노년 신사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여성 참가자들은 자기소개 시간에서 “외모는 보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시선은 가장 먼저 상대방의 얼굴과 옷차림에 머물렀다. 여성들은 남성 선택 기준으로 ‘지적이고 점잖은 분위기’를 꼽았다. 한 여성 참가자는 자신의 짝을 두고 “사람이 일단 너무 점잖고 멋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키만 좀 더 컸으면 진짜 멋졌겠다”며 외모를 지적해 웃음을 줬다. 이외에도 여성들은 “스마트하고 지적인 남자(스테파나·71)” “점잖고 순한 인상(수선화·81)” 등을 이상형으로 꼽았다.
남성 참가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짝에 매력을 느꼈다. 용출(76)은 “이 나이가 되면 몇 마디만 나눠도 이야기가 잘 통하는지 알 수 있다”며 “눈빛, 표정 같은 얼굴의 분위기로 나와 어울리는 사람을 알게 된다”고 했다. 닉네임처럼 처음부터 한 사람만 선택해 순애보를 보인 봉선화연정(80)은 “지성적인 면에서 통하는 느낌이었다”며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가 오갔다”면서 주고받는 대화 속에 감정이 커졌다고 했다.
시니어들이 맘에 드는 이성을 붙잡은 방법은 뭐였을까. 동서고금 공통 작업 멘트인 “맛있는 것 사줄게”였다. “스테이크 쏘겠다(노을)” “끝나고 고깃집 가자(봉선화연정)” “맛집 데려가겠다(초원)” 등 남성들은 맘에 드는 여성에 군침 도는 애프터를 약속했다. 실제로 행사가 끝나자마자 커플들은 근처 맛집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이날 7쌍의 커플이 탄생했고, 마음이 맞는 동성 친구 3쌍이 우정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황혼의 연애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저무는 하루의 끝에 누군가와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로맨스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