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중국에서 시행되던 궁형(宮刑)은 남성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이었다. 이 형벌을 선고받으면 많은 죄수가 미련 없이 죽음을 선택했다. 차라리 죽음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잃은 개인은 타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게 마음까지 병든다고 한다. 심리학적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이번 사자성어는 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구, 소 우, 한 일, 털 모)다. 앞 두 글자 ‘구우’는 ‘아홉 마리 소’다. ‘일모’는 ‘털 한 올’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아홉 마리나 되는 소 가운데 겨우 털 한 가닥’이란 의미가 성립한다. ‘넓은 바다 가운데 좁쌀 한 알’을 뜻하는 ‘창해일속(滄海一粟)’과 함께 ‘매우 적음’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사마천은 한(漢)나라의 역사가다. 특이하게 그의 초상화엔 수염이 없다. ‘사기(史記)’ 집필을 겸하며 순탄하게 고관 벼슬을 하던 40대 중반에 민감한 사건에 연루되어, 궁형을 선고받고 고환을 제거당했기 때문이다.
동양의 헤로도토스(기원전 484~기원전 425)로 칭해지기도 하는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90)은 사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문, 달력, 기록 등을 담당하는 고위 관료인 태사령(太史令) 신분이던 부친의 권유로 20대 초반에 중국 각지를 답사하며 역사가의 자질을 키웠다. 35세에 부친을 여의었고, 3년 후 태사령 지위에 올랐다.
사마천은 42세부터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역사서 편찬에 본격 착수했다. 그가 죽음 대신 궁형을 선택한 것은 이미 착수한 ‘사기’ 저술 임무를 완성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죽는 선택을 한다고 해봐야 아홉 마리 소 가운데 고작 털 한 올이 없어지는 그런 일에 불과할 걸세.’ 궁형을 선택할 때의 참담한 심경을 사마천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구우일모’는 여기에서 유래했다.
‘사기’ 집필과 관련해 사마천은 세 번의 큰 결단을 내렸다. 첫째, 42세에 ‘사기’ 집필에 착수했다. 둘째,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47세에 죽음 대신 궁형을 선택했다, 셋째, 역사서 ‘춘추(春秋)’를 저술한 공자의 서술 방식이나 유교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지 않았다. 그는 ‘사기’를 집필하면서 노자의 도교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기록된 여러 인물과 관련 일화들도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내용과 형식 모두 딱딱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덕분에 요즘에도 고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사기’의 ‘열전(列傳)’엔 무려 500명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단조롭지 않고 무척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 고대 중국의 문장가, 학자, 정치인, 무인, 자객과 협객, 해학가, 관료, 상인 등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의 일화가 주된 내용이다. 분량도 ‘사기’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바른 것을 북돋우기 위해 ‘열전’을 짓는다. 즉, 재능이 뛰어나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때를 잃지 않거나 천하에 공명을 이뤄나가는 이들을 위해 썼다.’ 사마천이 직접 요약한 ‘열전’ 저술의 취지다.
그는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와 세상의 부조리를 ‘사기’에 투영하며 남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가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고 결국 통쾌하게 복수까지 하는 인물들을 많이 다루고 부각한 이유다. 가능하면 권문세가보다 약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훼손되어 이제 쓸모가 없게 되고 말았구나.” 사마천은 궁형이 집행된 직후 이렇게 하늘을 향해 절규했다. ‘사기’를 집필하며 그는 ‘창자가 하루에도 9번 뒤틀리는(腸一日而九回)’ 육체적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여름철엔 악취를 풍겨 가족들도 그와 거리를 뒀다.
내면과의 치열하고 고독한 전투를 마친 대(大) 역사가의 위엄이란 바로 이런 걸까? ‘사기’ 어디를 읽어봐도 분위기나 필체에서 패배자라는 자의식을 발견하기 어렵다. 비이성적 전횡을 휘두르던 권력에 의해 신체의 중요한 한 부분을 제거당하거나 죽어야 하는 갈림길에서, 그는 ‘구우일모’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일관된 의지로 ‘사기’를 완성하고 청사(靑史)에 미명(美名)을 남겼다. 놀랍고 왠지 위안도 된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