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향의 ‘명월관’
이난향의 ‘명월관’ 디지털 에디션

‘남기고 싶은 이야기-명월관’의 디지털 에디션을 연재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던 이난향(1901~79)이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긴 글입니다. 기생이 직접 남긴 기생의 역사이자 저잣거리의 풍속사,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구한말 격동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후에 확인된 팩트와여러 등장인물 및 사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더욱 풍부한 스토리로 다듬었습니다.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님 옆에 그림자처럼 지켜 서서 내조를 다하던 한 여인이 있었다.
다동기생조합 제1대 향수를 지낸 주옥경(1894~1982) 여사가 바로 그 여인이다.
주 여사는 서도출신으로 기명은 산월이었다. 그는 손 선생님의 이름과 함께 길이 기억에 남을만한 우리들의 대선배다. 내가 13세로 서울에 올라왔을 때 주 선배님은 나보다 한걸음 빨리 서울에 와 있었다. 그때 나이 19세였다. 나어린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따뜻한 손길을 넣어주셨고 험난한 세파를 헤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기둥이 되어주셨다.
당시 손병희 선생님께서는 천도교 제3대 교주로 교인들에게는 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겨레에게는 앞길을 밝혀주시는 마음 든든한 지도자였다.
천도교에서는 연중 세 차례의 큰 기념행사가 있었다. 음력으로 4월5일은 천도교 제1대 교조 최제우(수운) 선생께서 하늘로부터 천도를 계시 받은 천일(天日) 기념일이었다. 또 8월 14일은 제2대 교주 최시형(해월) 선생이 수운대사로부터 천도교를 전속하신 지일(地日) 기념일이었고 12월 24일은 제3대 교주 손병희 선생께서 해월선사로부터 교세를 물러 받은 인일(人日) 기념일이었다.
이들 3차례의 기념일이 되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교인들이 구름처럼 서울에 몰려왔고, 천도교 본부에서는 지릉 동대문 밖 상춘원(현 금릉위궁자리) 뒤 공터에서 원유회를 벌였다. 이 잔치에는 장안의 유명한 요리점들이 총출동하여 모의점을 내고 저마다 음식 솜씨를 자랑했으며 신자들은 아무 곳에 가서 배불리 먹고 즐겼다. 요즘 말하는 ‘칵테일 파티’ 같은 것이었다.
잔치에 노래와 춤이 빠질 리 없었다. 무대를 꾸며 광대가 나오고, 각 권번에서 명기들이 차출되어 춤과 노래로 재주를 겨루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 무렵 서화와 서도에 능했던 주 선배께서 손 선생님의 주목과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 선배께서 22세쯤 되는 해 손 선생님께서 주 선배를 안으로 부르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