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1927년, 조선공산당 공판 참관단으로 경성에 도착한 서진문

2024-06-29

서진문은 1927년 9월 “조선공산당·고려청년회사건’ 공판을 방청하기 위해 재일조선노총에서 보낸 특파원에 포함돼 경성에 도착했다. 서진문은 가나가와조선노조 상무위원 자격으로 재일조선노총 중앙집행위원 김추, 정남국과 함께 파견됐다.

경성으로 파견된 재일조선노총 대표들

서진문은 1927년 9월 13일, 조선공산당사건 공판일에 딱 맞춰 경성(서울)에 도착했다. 서진문이 속한 재일조선노총 파견단 외에도 강소천(신간회 도쿄지회), 김정희(재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 곽종렬, 송을수, 박재천(이상 신간회 교토지회)도 도착했다.

당시 신문보도에는 가나가와조선노조의 경우 서진문만 이름이 적시돼 있지만 이동재도 동행했다. 동경조선여성청년동맹 대표로 온 김정희는 가나가와조선노조와도 연결된 이다. 그녀는 경북 영천 출신으로 1927년 8월부터 가나가와조선노조에서 김천해와 함께 조직선전부를 맡았고 근우회동경지회에서 선전부를 맡아 활동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22년 11월 17일,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서진문이 방청한 첫 공판이 열린 9월 13일 법정에 출석한 피고인은 모두 101명이었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사건으로 검거된 이는 모두 1000여 명에 달했다. 1차 검거는 1925년 4월 창당 이후 같은 해 11월 신의주에서 시작돼 확산됐다. 2차 검거는 1926년 6.10 만세운동 전후로 조직이 흔들린 만큼 추가됐다. 공판 피고 중 20명은 1차 검거 때 체포돼 2년 가까이 감옥에 갇혀 있었다. 나머지 81명은 2차 검거 때 전국에서 체포됐다.

피고들의 취조 기록만 4만여 쪽에 이르렀고, 사건 담당 일본인 재판장이 기록을 보는 데 4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사건 담당 검사는 ‘조선의 대사건이라느니보다 세계적 대사건’이라고 평하면서 3.1 만세운동과 또 다른 성격으로 일제를 위협하는 사건으로 취급했다.

조선공산당 사건 공개재판은 단 두 번에 그쳐

일제 당국뿐 아니라 조선 전체가 주목하는 가운데 공판이 개정됐지만 단 두 번만 공개재판이 이뤄졌다. 재판 방청권은 극도로 제한해 배포됐다. 피고 101명의 가족만 따져도 수백 명이고, 지인들과 곳곳에서 모여든 사회단체 회원만 해도 수천 명에 달했기 때문에 방청권은 턱없이 부족했다. 1회 공판 전날 밤 비가 오는 가운데도 수백 명이 기다리며 불과 80장에 불과한 일반방청권을 구하려 했다. 원래 40장만 배포한다던 것에서 늘어난 숫자가 그 정도였다. 결국 방청하지 못한 이들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한 채 피고인들을 호송하는 차량이라도 볼 마음으로 길가에 줄을 지어 섰다.

검사 측은 첫 공개재판 이후 재판부에 비공개 공판을 요구했다. 9월 15일 재개된 2회 공판 도중 재판부가 비공개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공개 방청은 2회 공판 도중에 멈추고 15일 오후 1시 20분부터 완전히 금지된다. 기자들에게는 법정 안에서 일어난 내용을 신문 기사로 내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검사가 내세운 명분은 ‘공공 안전을 방해할 염려’였으나 실제 이유는 구속과 수사 중에 자행했던 위법행위, 피고인들이 당한 고문과 옥고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자 은폐한 것이다. 해당 내용을 보도한 기사만 묶어보면 다음과 같다.

“문제가 붓허잇는대로 의연 계속될 속행공판” <동아일보> 1927.09.15. “대공판 벽두에 돌발한 피고 불법이송 문제” <조선일보> 1927.09.15. “층생첩출하는 파란 위법에서 공개금지에” <동아일보> 1927.09.16. “고문고소와 공당공판” <동아일보> 1927.10.20. “고문경관 고소에 동경 법조단 성원” <조선일보> 1927.10.22.

재일단체 대표단 재판부에 항의하는 공동행동

서진문도 2회 공판 도중에 법정 밖으로 나와야 했다. 이때부터 재일단체 대표단은 재판부의 파행적인 행태에 항의해 공동행동을 벌인다. 먼저 9월 22일 오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방청 금지를 풀고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총독부는 주변 경계는 낮출 수 있지만 공판 방청 문제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그 대신 재판장과 면담을 주선해 대표단이 오후에 법원으로 찾아갔지만 공판이 끝나기 전에는 면회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상황을 접한 가나가와조선노조는 9월 15일 요코하마 토베 구락부에서 조선노동자대회를 열어 재판부 비판 연설을 하고, 만장일치로 조선총독부 법무국장과 경성지방법원장에게 항의문을 보내기로 결의한다. 그리고 공판에 참여하는 변호사에게 격려문과 함께 성금을 모아 발송하기로 했다. 성금은 11월 21일 변호인단에 도착했다. 가나가와 노동자들이 금연해 절약한 현금 3원을 모아 보냈다. 9월 15일 결의 후 한 달 넘게 모금했는데, 당시 1원은 현재 우리 돈으로 약 10만 원에 해당한다.

재일단체 대표단은 이후 공산당사건 피고인들의 가족을 모아 위로하는 ‘공산당 피고 가족 위안회’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런 행사마저 일제 종로서 경찰서는 불온하다고 판단을 내려 금지했다. 대표단이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과 경찰부 고등과장에게 행사 불허 통보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지만 끝까지 금지시켰다.

9월 30일에는 조선공산당 공판에 수고하는 변호사들을 격려하는 위로회가 열렸다. 서진문은 ‘변호사 위로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 재일본조선인단체와 경성지역단체가 공동 주최한 행사였다.

10월 8일, 변호인단에 늦게 합류한 일본자유법조단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와 재일노총에서 추가로 파견한 박균이 도착했다. 후세 다쓰지는 박열 재판의 변호를 맡은 것으로 잘 알려진 인권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였다. 참고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을 만큼 독립운동과 긴밀했던 이였다.

서진문과 함께 가나가와노조 대표로 먼저 도착해있던 이동재는 누구보다 후세 다쓰지를 크게 반겼다. 바로 1년 6개월 전 나주 궁삼면 농민항쟁 사건을 의뢰받은 후세 다쓰지와 동행해서 조선에 왔던 인연이 있었다. 1909년 동양척식회사가 1400여 명의 농민이 소유했던 시가 200만 원 상당의 토지를 단 8만 원에 강압적으로 매수해 법적 분쟁이 벌어진 사건이었다. 후세 다쓰지는 박열 대역사건과 궁상면 농민항쟁에 이어 조선공산당 사건까지 함께해 조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후세 다쓰지는 경성에 도착한 다음 날, ‘비밀재판은 불법’이라는 내용을 담아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 뒤 서대문형무소로 가서 피고인들을 차례로 접견했다. 연합대환영회는 11일에 열렸으며, 서진문이 포함된 재일단체 대표단도 자리에 함께했다.

재일조선인 대표단은 10월 13일에 열기로 한 “언론집회 폭압 탄핵 대연설회”에 참여를 결정했다. 대표단 중 강소천, 박균, 이동재 등이 연설자로 이름을 올렸다. 연설회는 조선변호사협회가 주최하고 신간회를 비롯해 사회단체가 후원한 행사로, 조선공산당사건 공판 개시 한 달에 맞춰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기로 했다. 하지만 일제 경찰은 대회가 임박한 시간에 금지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행사장 일대는 참석자들과 무장경찰이 한 데 뒤엉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서진문과 함께 파견된 이동재 허위 신고로 체포

연설회가 무산된 이틀 뒤인 10월 15일, 가나가와조선노조에서 서진문과 함께 파견된 이동재를 비롯한 두 명이 경찰에 검속된다. 경찰은 이동재가 머물고 있던 여관에 불온문서 <무산자신문 호외>가 있다는 첩보를 앞세워 압수 수색했다. 하지만 첩보는 사실이 아닌 허위 신고였고, 결국 이틀 뒤에 석방한다.

10월 22일, 재일조선인 대표단은 조선총독부를 재차 방문해 총독대리 법무국장과 경무국장에게 항의문을 전달했다. 이 항의문은 조선공산당 피고인을 고문한 사건에 대해 엄중히 수사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조선공산당 공판에 맞춰 방문한 재일단체 대표단의 행보는 일본 노동농민당(労働農民党 약칭 노농당) 소속 변호사 카토오 칸이치(加藤寛一)가 변호인단에 합류할 때까지 이어진다. 앞서 후세 변호사 때와 마찬가지로 환영회가 10월 23일에 열렸다.

그보다 앞서 대표단 중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이는 재일조선노총 중앙본부를 대표해서 참가했던 정남국이다. 정남국은 10월 14일에 오사카로 되돌아간 뒤 여러 단체가 모여 진행된 ‘진상 보고회’에 참가해 경성지방법원 공판 과정에 드러난 숱한 불법을 폭로했다. 가나가와조선노조에서 파견돼 체포까지 당했던 이동재는 11월 1일 도쿄로 향했다.

서진문은 10월 말, 재일단체 대표단을 비롯해 한 달 넘게 함께 고생한 동지들과 작별하고 경성을 떠나 고향 울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10월 30일, 방어진 혁노회관에서 개최한 울산사회단체 연합간담회에 참가했다.

배문석 시민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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