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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그 날이 올 것이다. 차례대로는 아니라 해도, 그 아무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깝던 의사 한 분이 떠오른다. 나는 그를 늘 약자의 아픔을 돌본 휴머니스트 의사로 기억한다. 참 꾸밈없고 솔직한 분이셨다. “이 산, 저 산~” 하며 창을 부를라치면 세상이 쩡쩡 울리는 목소리를 지녔었다. 오래전 나는 의사 선생 부부와 젊은 신부님 한 분과 함께 넷이 안나푸르나 등반을 했다. 한 이십 년은 된 것 같다.
모두 나만의 통증 지닌 채 살아
시대의 통증도 스치는 바람이길
그 모든 미움이 착각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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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여섯 시간은 산에 오르고, 해가 지면 산속의 숙소에 짐을 풀고 닭 한 마리에 마늘을 넣고 푹푹 끓여달라 부탁했다. 그곳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 우리에게 백숙은 최고의 음식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의사 선생과 신부님, 그리고 한잔 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술을 즐기는 나, 우리는 여행 내내 마셨다. 술이 좀 들어가면 농담처럼 의사 선생은 말씀하셨다.
“나이 들어 만일 우리 화가님 많이 아프면, 그리고 화가님 어머님도 아프지 않게 보내 드릴게요.” 엉뚱하게도 그때 그 말이 내게 참 따뜻하게 들렸다. 술을 좋아하던 젊은 신부님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술만 마셨다. 성모 마리아의 은총을 받으며, 우리는 매일 취해 잠들었다가 새벽이면 날개를 달고 산에 올랐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러 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십 년은 된 것 같다. 세월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아무도 예외일 수 없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나이를 먹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생의 소중한 아군을 잃어버린 듯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안락사를 주제로 한 영화를 보면서 오랜만에 그 의사 선생님이 떠올랐다. 목디스크 수술을 한 지 삼 십여 년이 흘러 후유증으로 만성 통증을 앓는 어머니를 위해 나는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통증 패치를 받으러 다닌다. 다시 수술하긴 아흔다섯은 너무 많은 나이다. 한동안 병원에서 규제가 돼 그전처럼 패치를 충분히 받을 수가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운 어머니를 위해 도움이 된 건 친한 후배가 준, 암 투병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기신 통증 패치였다. 오래전의 약효가 거의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얼마 후 규제가 풀려 어머니는 아주 영리하게 통증을 다스리며 살고 계신다. 통증에도 불구하고 그 빛나는 총기를 볼 때마다 내게 그 유전자가 함께 하길 빌어본다.
꼭 몸이 아니라 해도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통증을 다스리며 살아간다. 우리 모두는 다 이어져 있고, 세상은 온통 통증 덩어리다. 우크라이나에서 죽어가는 젊은 북한 병사들을 생각한다. 많은 사람의 낯익은 인용이 아니더라도, 나는 겨울이 끝나가는 지점이면 스물한 살 나이로 독립운동에 참여해, 해방되기 한 해 전 사십 세의 젊은 나이로 베이징의 혹독한 겨울 감옥에서 생을 마친 이육사의 시 ‘절정’의 이 구절을 떠올린다. 생의 통증의 절정,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보다 절실한 절망과 희망의 표현이 있을 것인가?
텔레비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몇 년 동안 어머니 얼굴도 보지 못한 아들이 자신이 전쟁에 나갔는지 모르고 있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북한군 포로들의 통증을 본다. 고통의 절정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봄은 온다. 봄이 온다고 해서 겨울이 간 것도 아니다. 이어폰을 끼고 무언가를 들으며 세상 길을 걷는 게 취미인 나는 걸핏하면 이어폰을 잃어버린다. 오래 사용하면 청각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라 이번엔 귀속에 꽂지 않고 귀에 거는 골전도 이어폰을 주문했다. 음악을 들으며 뛰거나 수영할 수도 있는 신기한 물건이다. 밤 열한 시에 주문했는데 아침에 문밖에 와있다. 여기가 천국이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불치병을 앓는 젊은 지인이나 나이 드신 친척들이 병원에서 고통스럽게 돌아가시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천국이란 아프지 않고 죽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정말 그런 내일이 올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이 짧은 생을 여행하는 관광객이다. 세상 구경을 하며 걸어가는데 난데없는 전화 소리가 무뢰한 총성으로 느껴지는 시대, 지금 이 시대의 통증은 80년 전 시인의 통증에 비하면 이 또한 지나갈 바람일 것이니.
우리는 오늘도 편을 갈라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한다. 그 옛날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타인을 미워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어쩌면 그 모든 미움이 착각일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시인의 그 ‘강철 무지개’가 내 머릿속을 영 떠나지 않는 것이다.
황주리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