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서에 채울 게 없어요”… 코로나 학번 취업 포비아 [심층기획-‘쉬었음’ 청년, 그들은 누구인가]

2025-03-03

(상) 길잃은 코로나 학번

대외활동 꽉 막힌 채 졸업

인턴 경험 없어 취업 불리

쉬는 청년 9개월째 늘어

입학하자 팬데믹

집합 활동 중단에 학내 교류 부족해

해외여행 묶여 스펙 쌓을 기회 차단

졸업하니 고용한파

500대 기업 61% 상반기 채용 안해

그마저도 신입보다 경력 선호 뚜렷

이도저도 안되니 ‘알바’나…

‘쉬었음’ 청년 증가 사회에도 악영향

노동시장 영구탈락 땐 장기적 손실

청년 인구(15∼29세) 중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는 ‘쉬었음’ 비중이 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41만1000명의 청년이 특별한 사유 없이 지난 한 주간 일하지 않고, 구직활동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쉬고 있다고 답했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는 대학생들은 코로나19의 후과를 체감하고, 직업계고 학생들은 더 벌어진 대·중소기업 격차에 좌절한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이 취업을 일단 유예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쉬었음’이 될 수밖에 없는 청년들, 그럼에도 쉬고 싶지 않은 청년들의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짚어본다.

“2학년이 되자마자 코로나19가 시작돼 동아리랑 대외 활동이 전면 중단됐어요. 인턴 경험은 고사하고, 자기소개서에 쓸 만한 게 없어요.”

지난해 8월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한 19학번 A(24)씨는 반년 넘게 지속하는 구직 생활의 어려움을 3일 이같이 설명했다. 정치외교학과 출신인 A씨는 대학 입학 뒤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진행하는 ‘쿨재팬 리포터’에 지원해 합격했다. 일본 현지 방문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2020년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제한돼 활동이 잠정 중단된 탓이다. A씨는 “대학생이라면 흔히 한다고 생각하는 활동들을 전혀 할 수 없는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대외 활동 경험이 적다 보니 인턴 지원에서 밀리고 인턴 경험이 없어 정규직 공채에서도 불리한 것 같다”고 토로했다.

졸업 뒤 사회로 나오고 있는 일명 ‘코로나19 학번’들이 구직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코로나19 학번이란 코로나19 유행 시기에 대학에 입학했거나 대학에 재학 중이면서 제대로 된 학내 및 외부 활동을 못 해본 세대를 뜻하는 조어로, 20학번에 더해 2020년 2·3학년이던 19·18학번까지를 일컫는다.

20학번이 지난해부터 졸업하기 시작해 코로나19 학번이 사회로 본격적으로 쏟아지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뛰어든 취업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점이다.

지난달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업의 61.1%는 상반기 신규채용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거나 수립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채용계획 미정’은 41.3%, ‘채용 계획 없음’은 19.8%였다. 지난해 동기 대비 각각 3.9%포인트, 2.7%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엄혹한 고용 시장 상황은 코로나19 학번의 ‘일경험 부족’ 문제와 맞물려 무력감을 키우고 있다. A씨는 “코로나19 시기 산학 협력 인턴이 대폭 줄어든 영향으로 별도 인턴 경험은 없다”며 “기업에서는 갈수록 경력 채용 비중을 늘리는 터라 더 막막하다”고 말했다.

2023년 8월 졸업 이후 1년반 동안 구직 중인 19학번 B(27)씨도 공채 시즌을 겪으면서 비슷한 어려움에 처했다고 했다.

서울 4년제 대학을 나온 그는 “면접장에서 중고신입 지원자들은 흔하게 만났다”고 말했다. B씨는 졸업 후 60여개 기업에 서류를 냈지만 그중 5곳만 연락이 와 면접을 봤다.

B씨 말처럼 중고신입 비중은 늘고 있다. 한경협이 최근 매출액 상위 5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대졸 신규 입사자 28.9는 경력 보유자였다. 2023년 대졸 신규 입사자 중 중고신입 비중(25.7)보다 3.2포인트 오른 수치다.

취업시장에서의 중고신입 증가는 기업이 경력직을 선호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한경협 조사에서 올해 상반기 대졸 신규채용 계획인원 중 경력직 비중은 평균 31.2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1포인트 올랐다. 경력직 비중이 ‘50 이상’인 기업이 23.8로 지난해 8.1에서 15.7포인트 급증했다. 박용민 한경협 경제조사팀장은 “경기 둔화로 기업들이 신속히 성과를 내는, 실무 경험이 있는 인재를 선호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른바 ‘공채의 종말’이다.

경력 중심의 수시 채용일수록 구직자 입장에서는 정보가 더욱 중요하다. 이 역시 코로나19 학번이 학내 교류 기회가 부족했다는 점에선 또 한 번의 무력감을 안겨준다. A씨는 “여대 특성상 코로나19 이전에도 선후배 간 교류가 활발한 편은 아니었는데 코로나19로 교류가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다”며 “취업한 선배들로부터 정보를 얻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한탄했다.

졸업 뒤 첫 일자리를 찾는 데 걸리는 기간은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의 ‘월간 노동리뷰 9월호’에 실린 통계청 조사를 기초한 ‘청년의 첫 직장 분석’에 따르면 최종 학교 졸업 뒤 첫 일자리 입사까지 걸리는 기간은 11.5개월로 전년 동월 대비 1.1개월 증가했다. 이는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장 기간이다.

대학 졸업 뒤 미취업 상태인 A씨와 B씨 경우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쉬었음 청년’(15∼29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쉬었음’은 육아나 학업 등 이유를 들지 않고 ‘그냥 쉰다’고 응답한 경우다. 취업자나 실업자에 속하지 않는다. 지난 한 주간 일하지 않았고, 적극적인 구직활동도 하지 않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다. 여기서 구직활동은 단순히 구인광고를 보는 게 아니라 업체에 전화로 문의하거나 원서를 접수하는 등 행위를 뜻한다.

‘쉬었음 청년’ 규모는 가파르게 늘고 있다. 지난해 5월부터 전년 동월 대비 증가세로 전환돼 9개월 연속 늘고 있고, 올해 1월 43만4000명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7.7%(3만1000명) 늘어난 규모다.

지금은 구직활동 중이지만 얼마 전까지 ‘쉬었음 청년’이던 C(28)씨는 구직 기간이 오래되면서 ‘쉬는 시기’를 지나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2월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재학 중에는 공인회계사 시험에 몰두했고, 이후에는 동기와 함께 창업을 준비했다. 두 도전을 모두 접은 뒤 그는 3개월을 말 그대로 쉬었다. C씨는 “중소기업에 들어가서 아등바등 살 바엔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다가 쉬다가 다시 아르바이트하면서 사는 게 더 나은 삶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용 시장에 청년들이 가고 싶어 하는 일자리가 줄면서 나타나는, 그들만의 ‘합리적 선택’이라고 분석한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기업이나 공공부문 일자리만이 아니라 중견, 중소기업도 갈 만할 일자리가 돼야 하는데 잘 안 되지 않느냐”며 “청년들은 다닐 만하지 않은 기업에 들어가기보다 차라리 쉬고 충전의 시간을 가지는 게 유익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 비율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문제는 ‘쉬었음 청년’ 증가가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청년 시기 일경험이 없을 경우 노동시장에서 영구 탈락할 가능성이 커진다”며 “생애 주기별 움직임을 놓고 볼 때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중소기업에서는 구인난이 심각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빈 일자리 해소 차원에서라도 청년들이 고용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정부가 유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청년들이 가고자 하는 일자리를 만드는 것과 ‘쉬었음 청년’을 사회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두 가지가 병행돼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김 교수는 “청년의 경력 경로는 다양할 수 있는데 이들을 모두 실패자 취급해서는 안 된다”며 “쉬는 시간을 의미 있게 쓰도록 하는 지원책도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동시에 내실 있는 중소기업 일자리를 발굴하는 데도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지민 기자 aaaa3469@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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