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건설사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2022년부터 2024년 2분기까지 총 8명의 근로자가 중대재해로 사망했다. 이 중 절반은 동일한 유형인 ‘추락’ 사고였다. 2022년 4월에는 와이어로프에 맞은 근로자가 추락해 숨졌고, 2024년 2월에는 낙하물 방지망 해체 작업 중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또 2023년 10월과 2024년 3월에는 근로자가 개구부로 떨어져 연이어 목숨을 잃었다. 특히 8건 모두 하청 근로자에게서 발생한 사고였다.
17일 중앙일보가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2022년 중대재해처벌법 도입 이후 2024년 2분기까지 발생한 중대재해 사망사고 관련 기업 명단과 재해 개요를 단독 입수해 전수 분석했다. 해당 기간 총 1418건의 사건이 발생했고, 1490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민단체는 중대산업재해 발생 기업의 명단 공개를 요구하고 있으나, 고용노동부는 “수사·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라며 이를 거부했고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에 중앙일보는 일부 익명 처리해 보도한다.
50인 이상 건설업 재발율 27.9%

중대재해는 똑같은 곳에서 반복됐다. 중앙일보 분석에 따르면 동일한 원청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한 재발 비율(개인업자·개인건설업자를 제외)은 9.24%에 달했다. 특히 50인 이상(공사금액 50억 원 이상) 건설업에서는 재발률이 27.9%까지 치솟았다. 2022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 대해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 원 이하의 벌금 등을 묻는 강력한 처벌이 도입됐음에도, 대형 건설사 사업장 중심으로 중대재해가 반복되고 있다는 의미다.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은 “재발이 많다는 건 기업이 안전보건 역량 강화에 투자하기보다는 대형 로펌 자문을 통해 처벌을 피하는 데 더 집중한 측면이 있다”며 “처벌보다는 산재의 실질적인 예방과 개선을 위한 법률의 기능적 개편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중대재해법 전문가는 "중처법이 적용되려면 산안법이 먼저 적용되어야 하는데 규칙을 보면 674개나 되고, 규정도 모호한 게 많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다 지키기 힘들고, 모호한 규정으로 법망은 피해갈 수 있게 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함병호 한국교통대 화학물질특성화대학원 교수는 "사업장 마다 반드시 지켜야 할 필수지침을 만들고 그걸 어겼을 때는 좀 더 엄하게 처벌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효과적"이라고 짚었다.
하청 44%, 재발 사건 하청 비율은 82%
중대재해는 주로 산업현장의 ‘약한 고리’에서 발생했다. 전체 중대재해의 44.78%가 하청에서 발생했고, 재발 사고의 경우 하청 발생 비율이 82%까지 치솟았다. 예컨대 B공기업에서는 2023년 4건, 2024년 1건 등 총 5건의 중대재해 사망사고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4건이 하청 노동자에게서 발생했다. 또 시공능력 상위권 건설사 3곳에서도 같은 기간 각각 8건의 중대재해가 보고됐으며, 모두 하청 근로자가 희생된 사건이었다.

2022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지금까지 기소된 사건을 보면 중소기업이 87.1%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반면 중견기업은 13.5%, 대기업은 8.1%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현장에서는 원청의 책임 강화와 함께, 중소기업·하청업체에 대한 처벌보다는 실질적인 지원책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함병호 교수는 “중대재해처벌법 도입 이후 대기업은 안전 관련 비용을 크게 늘리며 개선이 있었지만, 중소기업은 그럴 여력이 부족하다. 하청 역시 3차 벤더 이하로 내려가면 여전히 산업안전 관리비용을 줄여 경쟁하는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소규모 사업장은 처벌 강화에도 불구하고 사고 감소가 더딘 만큼, 전문 인력 파견 등 지원 체계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건설근로자 사고사망률 OECD 2배

향후 중대재해는 건설업에서 사망사고를 얼마나 줄이느냐에 달렸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가 특히 건설업에 집중돼 사고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재해 사망자 10명 중 4명(39.7%, 유족급여 승인 통계 기준)이 건설업 종사자였다. 2023년 기준 한국의 건설업 사고사망만인율(근로자 1만 명당 사망자 비율)은 1.59퍼밀리아드로, OECD 10대 경제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며 평균(0.78)의 두 배에 달한다. 여기에는 한국 경제에서 건설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15%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큰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불법 하도급, 최저가 입찰 경쟁, 공사 기간 단축 압박 등 건설업계의 고질적인 관행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수영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건설업은 옥외 작업, 근로자 고령화, 사업 구조의 복잡성 등 다양한 변수로 위험 요인이 많고 불확실성이 높은 산업인 만큼 산업적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안전 관리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며 "국내 건설업의 사고 저감을 위해서는 건설업과 전체 산업 간의 안전 수준 격차를 줄이는 산업 차원의 전략, 국내 전체 산업의 안전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국가 차원의 종합적 전략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전문가들은 제도와 처벌 강화 못지않게 사회적 비용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중대재해를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는 핵심 요소라고 강조한다. 결국 안전과 생명을 위해 공사 기간이 늘어나고 건설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사회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여전히 우리 기업들은 공기 단축을 성과로 내세운다”며 “그동안 공기 단축과 비용 절감이 산업계의 핵심 경쟁력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안전이 곧 경쟁력’이라는 인식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기업이 생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중대재해처벌법은 단순한 법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비용의 문제”라며 “안전을 위해 추가 비용과 시간을 감수하자는 국민적 합의가 없이는 잠깐은 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중대재해를 크게 줄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선진국들은 수십 년 전부터 안전 규제를 강화해 초기에는 건설비와 제조비가 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산재 보상, 의료비, 생산 차질, 기업 이미지 손상 등 재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여왔다”며 “생명의 가치가 비용보다 우선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공고히 하고, 그 비용을 분담할 제도적 장치를 함께 마련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