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킹키부츠' 남자 공장 직원 스윙 역...총 4명 커버
"스윙데이로 무대 올라...관객들 환호에 전율 느껴"
"스윙은 공연 멈추지 않고 이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역할"
이것은 내가 꿈에 그리던 작품의 무대에 서기까지의 이야기다.
나는 ‘킹키부츠’ 머트/앙상블 역으로 오디션에 지원했다. 배역에 어울리도록 입고 갔던 멜빵바지를 감독님들께서 좋아해 주셔서 다행이었지만,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기지 못한 채 부른 노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리를 더 날카롭게 써달라는 코멘트를 받아 다시 노래를 불렀지만, 썩 잘 해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질의응답이 오갔고 무사히 오디션을 마쳤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더 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씁쓸했다.
긴 시간이 지나 불합격을 받아들이고 있던 어느 날, ‘스윙’으로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배우로서 평생에 한 번이라도 해보고 싶던 그 공연, 꿈에 그리던 ‘킹키부츠’에 내가 서게 되다니…. 내 삶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날아갈 것처럼 기쁘면서도 긴장이 되었고, 벅차면서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이상하고 행복한 기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들었다 놨다 했고, 막연했지만 처음 맡게 된 ‘스윙’이라는 배역을 익히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내가 맡은 역할은 남자 공장 직원 스윙이다. 후치, 사이먼, 머트, 리처드까지 총 네 명의 앙상블을 커버해야 했다. 각 배역을 어떻게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여러 훌륭하신 선배님과 이전에 스윙으로 참여했던 배우분들께 조언을 구했다. 배역마다 작은 수첩을 따로 마련해 노트를 구분하고, 대본과 함께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하며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아쉽게도 내 몸은 하나였고, 동시다발적으로 동선, 전환, 연기와 안무, 노래를 모두 체크하려다 보니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쫓아가기에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에 한 배역씩 익히려고도 해봤지만,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숙지할 것은 넘쳐난 탓에 전쟁같은 연습실에서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연습하면서 이전에 했던 공연들과는 다르게 안무를 해도, 노래를 불러도 배역과 내가 가까워지고 몸에 붙어 익숙해지는 순간들이 쉽게 오지 않았다. 언제 동선을 밟아도 새로운 느낌이었는데, 그 불안한 느낌은 ‘내가 지금 다른 역할과 혼동한 것은 아닌가’하는 아슬아슬함에서 온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 감각을 떨쳐내고 무대에서 확신을 갖기 위해 연습실을 집처럼 여기게 되었다.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지친 날도 있었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매일이 행복했다는 것이다. 작품이 주는 힘과 함께하는 동료들, 그리고 응원해 주시는 모든 분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연습실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했다.
연습실에서의 뜨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블루스퀘어에 들어와 객석에 앉아 내가 꿈꾸던 무대를 바라보니 그제야 ‘내가 진짜 킹키부츠를 하는구나’라는 실감이 났다. 스윙이라는 역할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느낀 탓도 있지만, 작품 특성상 무대 전환이 많고 작은 실수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장면이 많아 긴장의 연속이었다. 무대 장치, 의상, 조명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며 비로소 이 공연의 무게감이 피부로 와 닿았다.
‘스윙데이’가 정해지고 사이먼 역으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수없이 준비하고 기대했던 만큼 실수 없이, 충실히 즐기자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다. 따뜻하게 맞아주는 동료들 덕분에 걱정은 없었다. 무대 위 모든 순간이 소중했고 미칠 듯이 즐거웠다. 특히 1막 마지막 넘버 ‘Everybody Say Yeah’를 부르며 관객과 함께 환호할 때 느낀 전율은 정말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른 역할도 그렇지만, 특히 스윙들은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긴장감 속에서 공연을 올리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는 순간이 많다. 커튼콜을 할 때 비로소 시야가 트이며 객석을 바라보게 되는데, 그때 마주한 그 장관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분들께서 모두 일어나 무대를 향해 보내주시는 박수, 환희에 찬 표정으로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은 마치 반짝이는 바다를 보는 듯했다.
바라건대, 그 순간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멈춰 한 분 한 분께 그 감사함을 전하고, 그 시간을 깊이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도 없이 공연은 끝났고, 무대는 막을 내렸다. 그 순간을 가슴 깊이 간직하며, 그 에너지를 원동력 삼아 더 좋은 무대를 위해 나아가는 배우들과 그 무대를 찾아주는 관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Show Must Go On!’ 공연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공연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역할이 바로 스윙이다.
‘슬기로운 스윙생활’을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건강한 정신’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는 시간, 쌓여가는 연습할 거리들, 언제 투입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은 때때로 스윙을 지치게 한다. 이를 해결하는 나만의 방법은 부정적인 마음이 스며들기 전에 끊임없이 할 일을 만들어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본을 보고, 즐거운 상상을 하고, 운동을 하며 스스로를 채우는 습관을 들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은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동료들이다.
개인의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맡은바,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마음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배우, 스태프 모두가 함께 킹키부츠를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이기에 자부심이 느껴진다. 이런 긍정적인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더 나아갈 곳이 없을 만큼 단단해질 때, 좋은 시장과 환경도 우리 앞에 오게 되지 않을까.
바라는 점이 있다면, 관객분들께서 보고 계시는 무대 뒤편에서는 스윙들이 자신의 역할을 점검하며 만능 톱니바퀴처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분들께서 알아주시면 좋겠다. 덧붙여, 스윙으로서 하는 질문과 부탁에 단 한 번도 귀찮아하거나 싫은 내색 없이 늘 밝게 응해주신 동현, 종훈 형님, 성수 형님, 진식이 형에게 무한한 감사와 애정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항상 서로를 위한 마음 하나로 뭉쳐 있는 스윙들 동해, 명주, 은채, 연희, 준석에게도 찐한 포옹과 함께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내고 싶다.
글 : 뮤지컬 배우 임동주(1993.05.19.)
데 뷔: 뮤지컬 ‘창업’(2021)
출연작: 킹키부츠|왕자대전|동백꽃 피는 날|고헌, 1921|창업|내가 광이 날 상인가|삼월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