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 칼럼니스트

신제주 신시가지에 있는 D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읍내 단독 주택에 오래 살다가 아들네가 내놓은 이사의 당위성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노쇠한 부모를 염려하는 두 아들의 배려를 효도로 받아들이면서, “그러지, 뭐.”한 게 이사의 속도를 냈다.
때로는 삶의 지형이 가파르게 변하기도 하는 게 인간사다. 취락구조 개선 마을의 조그만 와옥(蝸屋)에서 도심에 있는 아파트로 짐을 싸 들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으랴. 예전 같았으면 철학관을 찾아 운세를 기웃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효자를 둘씩이나 둬 호강하게 됐다고 들떠, 얘들 덕에 팔자에 없는 도시 아파트에 살게 됐다고 어깨 으쓱했던 게 사실이다. 4년 전 얘기다.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환경의 변화를 실감했다. 선밥을 받아 앉거나 생쌀을 씹는 것 같았다고 할까. 15층 아파트의 13층을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면서, 그 낯섦과 마주했던 서먹한 기분은 아직도 마음 한켠에 남아 있다.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30가호의 주민들에게 신고를 못 할망정 알아차려 보내는 눈인사쯤은 사람의 도리 아닌가. 웃음 머금고 “안녕하세요?” 한마디 하면 되는 건데, 실행이 쉽지 않았다. 나이 좀 들었다고 꼰대 티를 내려는지 혀가 돌아가질 않는 게 아닌가. 안면 근육도 뻣뻣이 경직되고 그랬다. 도농 간 문화의 차이 같은, 미소를 띠고 가볍게 인사하는 매너가 몸에 배고 안 배고의 차이를 넘는 게 그냥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같은 일상어인데도, 서울 말씨에서 세련미를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런 시너지 효과일 테다.
그런 내게 사람만 환경에 적응하는 게 아님을 보여준 게 길고양이였다. 아파트 단지에 나다니는 고양들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멘 처음 눈에 들어온 게 노란 줄무늬에 덮인 몸집 큰 녀석이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활짝 갠 가을날, 녀석과 해후했다. 낯선 만남이었다. 첫 만남이라 혹시 놀랄라 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조신하는 나와 달리 녀석의 느긋한 모습에 내가 놀라고 있었다. 사람을 경계하기는커녕 눈 하나 깜빡 않고 어슬렁거리며 아파트 넓은 길을 횡단하는 게 아닌가. 이건 한 마을에 오래 살아온 터줏대감의 여유만만한 만보(漫步)다.
몇 년째가 되면서 길고양이 개체수가 예닐곱으로 늘어갔고, 새로 태어난 녀석들도 사람 앞에 태연하다. 어미에게서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것 아닌가.
이건 길고양이가 아니라 집고양이다. 내가 커 올 때는 밤에 닭장을 습격해 닭을 낚아챈다고 도둑고양이라 했는데, 이젠 아파트로 들어와 한 체급 신분이 상승했다고 인증 사진을 찍는 모습이다. 이도 그들이 세상을 살며 진화하는 것이라는 암시로 받아들였다. 일상 속의 작은 발견이었다. 주위와 임의롭게 지내는 것은 기본이란 인식의 전환이 내게 찾아왔다. 시간은 빈 데를 채워주는 학습의 기회이기도 하다.
아파트 둘레를 소요하는데, 화단에 고양이 먹이 그릇이 놓여 있다. 누군가 사료를 사다 무상 급식(?)을 하고 있다. 놀랐다. 쇼펜하우어는 거지에게 시선(施善)을 하지 말라 했는데,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건 어떤지.
생명을 외경하는 어느 분이 따뜻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