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비명(悲鳴)소리] 생지옥의 교육장(3)

2024-10-18

최종두 울산예총 고문(시인, 소설가)의 1980년 삼청교육대 수난기(受難記)를 연재한다. 울산MBC 기자였던 최종두 고문은 198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연재 글에는 인권을 짓밟는 ‘삼청교육’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고, 1970~80년대 울산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계 비사(祕史)도 엿볼 수 있다. 최 고문은 “1980년대는 찬탈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영혼을 뭉개버리는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전주 같은 목봉을 힘겹게 들게 하면서 서막을 열었다”며 “몽둥이와 총으로 지레 겁을 주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 제5공화국의 주구들”이라고 술회했다. <편집자 주>

나는 침상으로 올라가서 관물함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관물함의 정리 정돈은 기본이니까 모두들 따라 하고 있었다. 곧 선임 하사의 훈시가 시작되었다.

“주목! 여기가 어디야?” 내가 얼른 대답했다. “예! 순화교육장입니다.” “그래! 그럼 너들은 누구야?” “우리는 순화교육장의 교육생입니다.” “좋아! 너희들은 순화교육을 받으러 온 수련생들이다.”

‘앗차! 나는 수련생을 교육생이라 했으니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려는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는 군대다! 군대이기 때문에 복종만이 있다. 밖에 있는 저 자식 때문에 첫날 첫 시간부터 일과가 뒤틀리게 되었다. 대신 너희들이 책임지는 것이다. 지금부터 삼청교육을 상징하는 훈련을 받도록 한다. 모두 신발을 신고 연병장에 집합한다.” “실시.”

우리 소대는 연병장 가운데에 놓여 있는 전주 크기만 한 목봉 앞에 섰다. 분대별로 서다 보니 나는 1분대의 분대장으로 뽑히게 되었고 소대장을 겸하게 되었다. 연병장에 뒤처져버린 배00은 1분대의 3번이 되어 내 옆자리의 옆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은 내 옆자리의 수련생이었으나 그도 배00에 대해서는 별로 깊이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밀양 경찰서에 잡혀갔을 때 처음 만났을 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 배00이 무척 가엾고 불쌍해 보였다. 애처로울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주저앉은 채로 발길질을 당하고 있었다.

과연 삼청교육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목봉 체조였다. 10명이 종대로 서서 꼭 전주 같은 둥근 통나무를 왼쪽 오른쪽 어깨에 옮겨 메는 것을 반복하면서 50번쯤 하고 나면 또 다시 반복하고, 그러기를 수도 없이 하고 나면 양어깨의 살갗은 벗겨져 피가 흘렀다. 훈련복을 적실 정도의 땀과 피가 범벅이 되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힘에 부쳐 견디지 못할 때는 그 횟수를 더 늘려버리기 때문에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나는 1분대에서 키가 제일 컸기 때문에 내 어깨로 중량이 가장 많이 눌러주니까 한마디로 죽을 맛뿐이었다. 또 소대장으로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에 더 고될 수밖에 없었다. 원래 하나, 둘, 셋, 넷 하고 숫자를 외치도록 돼 있지만 교육생들은 구호를 외쳐야 했다. 정신, 수양! 육체, 수양! 하고 외치는 고함소리는 우리들의 힘찬 고함소리였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처절하게 내뱉는 절규였고 피울음의 신음소리였다. 한 생명이 죽어가면서 울부짖는 비명소리일 뿐이었다. 인간의 품성을 악함에서 선함으로 바꾸어놓기 위해서는 감동과 감화를 불어넣어야 하거늘 그런 것은 고사하고 인간의 품성을 더 악하게 또 황폐하게 만드는 허울 좋은 교육일 뿐이었다.

입소 후 첫 식사가 된 점심을 하고 난 다음 저녁은 거른 채 기합을 받게 된 것이다. 목봉 체조는 우리 분대원들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홉 사람으로 목봉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허우적거릴 만큼 지쳐 있었다.

삼청교육의 첫날은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다. 조교는 군가를 가르쳤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골짜기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뭐? 부모형제 단잠을 이룬다? 쳇, 부모형제 나 때문에 골병만 든다! 시펄!” 내 옆의 김00은 자주 주절거리며 불평을 쏟아냈다. 선임 하사는 우리 분대 김00에게 다시 연병장으로 가서 배00을 끌고 오라고 했다. 김00이 뛰어가서 배00을 부축하고 돌아온 것은 30분이 지나서였다. 돌아온 배00은 제자리에 들기 전 나에게 꾸벅 절을 하며 말했다. “소대장, 미안하다. 나 때문에…” 그는 소대원들에게도 절을 하며 “그저 죄송합니다.”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침상으로 어서 올라가도록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배00은 나의 손을 꼬옥 잡으며 또 말했다. “소대장, 정말로 미안하다.” “괜찮다! 우리 다 같이 고생하는 처지 아이가!” “그래도 정말 미안하데이.” 그는 미안함을 수줍게 나타내는 것이었다.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 청년이었다. 이런 티 없이 고운 사람을 뭘 순화시킬 게 있어 이런 생지옥으로 끌어왔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조교가 “분대장!”하고 불렀다. 조교는 대학노트 한 묶음을 건네주며 분대원들에게 배부하라면서 볼펜까지 주었다. 우리는 그 노트에다 ‘수양록’이라고 쓰고는 하루에 한 번씩 반성문을 쓰게 되었다. 그것도 대학노트 한 페이지의 한 면을 꼭 채우도록 적어야 했다. 분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수양록을 쓰지 못하면 분대원 전체가 기합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수양록의 작성은 필수적이었지만 그보다도 훈련 성적과 정신 순화 여부를 점검하는 것이어서 교육생들에게 수양록 작성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되어 있었다.

수양록을 쓰는 시간도 취침 전 10분 동안이었다. 늦게 쓰거나 쓰더라도 성의 있게 진실을 담지 않으면 그것도 화근을 부르게 되어 있었다. 역시 우리 분대는 배00이 문제였다. 나는 나의 수양록을 얼론 쓰고 나서 배00의 노트를 채워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 시간만 되면 꼭 가슴이 두근거렸다. 배00은 수양록을 쓰는 시간이면 나의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노트를 내밀고 항상 미안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노트를 받을 때마다 성의껏 써 주었다. 그의 순수하면서 꾸밈없는 모습이 어느새 나의 마음속으로 와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이라고는 제 이름자도 못 쓰는 그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거니와 순화교육에 앞서 그런 자에게는 글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반항심을 불러오게 했다.

최종두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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