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간 조선 쥐락펴락, 농부 동생 정2품 출세시켜

2024-10-17

“윤봉(尹鳳) 등 세 사신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왕은 황해 감사에게 “사신의 서흥(瑞興) 본가를 즉시 수리할 것과 영접하고 접대하는 모든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는 영을 내린다.(세종 9년 3월 23일) 윤봉은 황해도 서흥 출신의 명나라 내사(內史)이다. 그의 출현으로 우리 역사 최고 성군 세종까지도 좌불안석이 되는데 윤봉, 그는 누구인가.

사신으로 본국 온 명의 환관

윤봉은 화자(火者)로 명나라 황제의 환관으로 차출된 사람이다. 화자를 고자(鼓子)라고도 하는데 생식 기능이 제거된 사람으로 내시 또는 환관의 자격 요건이기도 하다. 명나라는 주변국으로부터 화자와 공녀를 정기적으로 차출해 갔는데, 환관의 경우 양국의 외교나 무역 문제를 조율하는 사신의 자격으로 본국으로 투입하곤 했다. 이소사대(以小事大)의 국제질서에서 중국 황제의 칙사를 응대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황제의 측근에서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선에 파견되는 황제의 내사는 대개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되는데, 본국 출신 환관에 대한 견제와 관리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봉은 태종 5년(1405년) 20세의 나이로 “아주 쓸모있는 환관”에 뽑혀 명나라 황궁으로 들어간다. 소년 화자들이 통상 14세에서 18세 사이인 점에서 보면 윤봉은 늦은 나이다. 바로 전해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 경사(京師, 수도)를 다녀온 양부(養父) 이빈(李彬)의 권유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으로 떠난 지 1년 후에는 황제의 배려로 본국 출신 화자 18명과 함께 부모를 뵈러 고국 땅을 밟는다. 다시 1년 후에는 황제의 칙서를 든 사신의 하나로 조선의 어린 화자 300~400명을 뽑아가는 임무를 띠고 왔다. 2달간 머무는 동안 그는 조선 국왕의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명나라 황제의 환관이 된 지 4년, 사신 온 윤봉은 조선 국왕에게 자신의 족친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청한다. 태종은 그가 요청한 10여 인 모두에게 서반직(西班職)을 제수하였다.(태종 9년 5월 6일)

“어리석은 동생 대접, 전하 은혜”

윤봉이 황제의 사신으로 다시 고국 땅을 밟은 것은 16년만인 세종 7년 2월이었다. 그간의 윤봉은 명황제 영락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오고, 또 조선으로 들어가는 내사 편에 자신의 본가에 곡식을 내려주고 요역과 잡공을 면제시켜 줄 것을 요청해온 터였다. 윤봉이 사신으로 오게 되자 조정에서는 그의 아우 윤중부(尹重富)의 벼슬을 높여 형을 마중하게 했다. 시골 농부에 불과했던 불학무술(不學無術)의 아우가 종5품 부사직(副司直)이 되어 나타나자 윤봉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는 “중부의 어리석음은 그 외모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무슨 공로가 있어 전하의 이와 같으신 은혜를 받았단 말인가”라고 하며 조선의 임금이 황제를 공경하고 자신을 생각해 준 것에 감격한다. 윤봉은 또 “서흥을 도호부로 승격시켜 만대(萬代)에 내 이름을 남기고 싶다”(세종 7년 2월 14일)는 욕망을 피력한다. 이에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흥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윤봉이 체류한 3개월 내내 왕은 윤봉의 서흥 본가에 쌀과 콩을 보내는 것은 물론 그가 이르는 곳이면 어디든 술과 고기를 보내주며 황제가 보낸 사신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사신 길이 열린 윤봉은 이후 해마다 조선에 들어왔다. 세종 7년(1425)에서 14년까지 8년 동안 매년 사신으로 입국한 윤봉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간 체류하면서 무역과 청탁 등의 일에 몰두했다. 이제 태감(太監, 최고지위의 환관)이 된 그는 자신의 가계 3대(代)를 추증해 줄 것과 족친에게 관직을 제수할 것을 요청한다. “윤봉의 아버지 윤신에게는 가정대부 경창부윤(慶昌府尹)으로 증직하고, 조부 윤단에게는 통정대부 공조 참의로 증직하며, 증조 윤공재에게는 통훈대부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로 증직한다.”(세종 8년 4월 8일) 윤봉의 족친 8인에게도 관직을 제수했다. 윤봉은 황제가 하사한 물품을 싣고 와 더 많은 물품을 바꾸어갔다. 한번은 윤봉이 요구한 물건이 2백여 궤(櫃)나 되었는데, 궤짝 1개를 메고 가는 데 8인이 필요하여 그 행렬이 숭례문 부근 태평관에서 사현(沙峴, 영천고개)까지 빈틈없이 이어졌다.(세종 11년 7월 16일) 사신의 물품 요구가 이보다 더 심한 때는 없었다는 불만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이듬해 다시 온 윤봉이 산삼 등을 미리 준비하라고 하자 도감에서 “(황제가 요구한) 칙서에 없다”며 거절하자 노한 빛을 띠기까지 했다.(세종 12년 6월 24일) 또 어떤 해는 사신 네 사람에 두목 150명이 따라 왔는데, 윤봉의 본가에서 머물겠다며 요청한 비용이 너무 많아 호조(戶曹)에서 그들을 대접할 물자의 부족을 호소했다.(세종 13년 7월 21일) 이 때 세종은 윤봉이 요구한 물건을 칙서에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대가가 새 칙서에 조선국 왕을 농락하는 표현으로 나타났다며 폐해를 만들지 않을 방안을 모색한다. 가능한 내시들을 후하게 대우하자며 황희·맹사성·허조 등의 재상들과 논의한다. “윤봉을 위로하는 데에는 그 아우 중부(重富)에게 총제의 벼슬을 주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중부가 비록 이 벼슬을 받을지라도 허직(虛職)과 다름이 없으니 무엇이 그렇게 아까우랴.”(세종 13년 8월 19일) 정승들은 입을 모아 “윤봉의 사람됨이 음흉하고 욕심이 많아서 불의(不義)한 일을 마음대로 행하는 자이니 후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지금 황제의 권세가 이 무리에게 있으니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세종은 윤봉의 아우 윤중부가 사위를 본다며 안장 갖춘 말을 하사했고, 윤봉은 조카사위 김숙리와 윤중부의 처족 이정에게 관직을 요청했다.(세종 14년 12월 1일)

돌아와 살 집까지 건축 요구

이후 윤봉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6년이 지난 세종 20년에는 “북경에 가는 통사(通事, 통역관)들은 궐내에서 윤봉을 만나면 피하고 불러도 가까이 가지 말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그런데 윤봉이 다시 나타나는데, 문종의 책봉 칙서를 들고 12년 만에 입국한 것이다. 윤봉의 나이도 65세에 이르렀다. 이 해에 윤봉은 5개월 이상 머물면서 각종 이권을 챙기는 데 분주했다. 윤봉은 왕에게 자신이 살 집을 지어달라고 요청한다. “황제의 은혜를 입어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면 이 집에 거주하면서 주어진 내 수명을 마치게 될 것이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문종 즉위년 8월 7일) 그리고 자신이 본국으로 돌아오면 조카이자 양자인 윤길생과 함께 살 것이니 노비와 진원(珍原)에 있는 양자의 농장 곁에 자신이 쓸 땅 100결을 달라고 한다.(문종 즉위년 10월 17일) 윤봉은 왕이 지어주는 자신의 집을 직접 감독하는데, 수시로 그를 위로하는 궁중의 술과 음식이 내려왔다. 집이 완성되자 윤봉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잔다.(문종 즉위년 10월 26일) 가족에 대한 청탁 또한 계속되어 동생 윤중부는 정2품에 올랐고, 조카사위 김숙리는 강화부사를 청하기에 이르렀다.(문종 즉위년 11월 8일) 당연히 그에 대한 대신들의 평은 좋지 않아 “탐욕이 과도해서 구하는 것이 만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6년 후 세조 즉위를 알리는 황제의 고명을 들고 윤봉이 다시 고국을 찾았다. 그의 나이 71세, 그렇게 아끼던 아우 윤중부가 죽은 지도 5년이 지났다. 윤봉은 세조에게 서흥을 향관(鄕貫)으로 삼을 것을 청하여 ‘서흥 윤씨’를 개창한다.(세조 2년 4월 28일) 자신은 비록 생물학적 후손을 둘 수 없는 몸이지만 그 아우 윤중부를 서흥 윤씨의 시조로 삼아 자신의 존재가 대대손손 이어지길 바랐다. 5개월 가량 머물다 간 세조 2년의 방문을 끝으로 윤봉의 고국 방문은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돌아와 살 새로 지은 집은 ‘매우 흡족하고 안온하게’ 하룻밤 자는 것으로 끝이 났다.

고국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황궁에 상주하며 본국을 향한 윤봉의 청탁은 계속되었다. 예종 1년 이후 그의 입김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80여 생의 그의 삶도 막을 내린 것이다. 황제를 등에 업고 조선 전기 60여 년을, 강한 군주 태종과 세종, 세조마저도 쥐락펴락했던 윤봉(1386~1469년 이후)에게 권력이란 무엇일까. 고향과 가족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최대한의 욕망을 투사한 윤봉에게 핏줄 또는 친족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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