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심, 시조시인·교육학 박사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고 마는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이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하루 만에 피고 지는 일일화(一日花).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그 짧은 생이 안타깝다. 이런 나팔꽃처럼 무더운 한 여름 아침 매일매일 새로운 꽃을 상큼하게 피워내는 꽃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바로 루엘리아라는 꽃이다.
루엘리아도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꽃이다. 루엘리아를 지리산 자락 어느 카페에서 주인에게 선물 받았었다. 마당에 심고 잊었는데 여름 아침에 마당에 나가보니 하늘하늘 얇은 꽃잎이지만 선명한 보랏빛 꽃이 세수한 얼굴로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길고 뾰족해 시원한 진초록 줄기와 잎 위에 그 순결함으로 우아하게 앉은 신비로운 꽃.
열대야로 잠을 설친 이른 아침에 마당에 나가 꽃을 보면 잠이 확 달아났다. 여린 보라 꽃잎은 손을 대면 금방 보라색 즙으로 변할 듯 종잇장보다 더 얇지만, 생명력은 강하다. 여행을 갔던 대만에서도 이 꽃이 보여서 집 마당에 있는 꽃을 보듯 반가웠다. 그러나 저녁 되면 시들어 떨어지는 모습이 안타까운데 그 맘을 아는 듯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다시 그 고운 여리여리한 보랏빛 자태를 보여주어 더운 여름 아침을 설레며 시작하게 만들어 주곤 한다.
올여름, 덥다고 모든 일을 미뤄둔 채 시원한 곳을 찾아 머물며 피서한다고 게으름 피우는 나에겐 매일 꽃을 피우는 일상을 거르지 않는 루엘리아 꽃이 큰 깨달음을 주었다. 아무리 꽃이지만 한여름 뙤약볕 내리쬐는 열기와 마른 땅에서 느끼는 갈증을 견디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매일 진초록 잎 위에 진보라색 꽃을 청초하게 피워 올려 무더운 여름날에도 자기 할 일을 다하는 루엘리아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이런 식물들의 꾸준한 인내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이글이글 태양이 대지를 달궈도 가뭄으로 목이 타들어 가도 한 모금의 빗방울이라도 내려주면 자기 할 일을 잊지 않는다. 며칠 전 친구가 애호박을 주면서 하는 말이 겨우 모종 네 개를 심었는데 백 개도 더 열린 것 같다면서 얼마나 잘 자라는지 감탄했다. 그 친구 성품이 부지런해 매일 밭에 가서 물을 주고 돌봤으니, 애호박도 그에 보답하느라 그랬을지 모르겠다. 상품으로 나온 애호박보다 두 배 세배는 더 크게 자란 애호박을 받아 들곤 이 더운 여름에 애썼구나! 하는 마음과 고마운 생각이 저절로 났다.
‘덥지 않은 여름은 여름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만 올여름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그러나 지구를 덮은 초록의 식물과 꽃, 나무들이 있어서 그나마 버티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맙게도 우리 제주는 한라산을 비롯한 오름과 생태숲 휴양림들이 가까이에 있어서 언제든 찾아가면 쉴 수 있으니 얼마나 복받은 일인가. 잘 자란 나무들이 있는 숲속은 우리를 쉬게 하는 초록의 맑은 공기로 언제나 반겨준다. 그만큼 아끼고 잘 돌봐야 할 것이다.
10월 6일 추석이 지났는데도 한낮의 태양은 아직도 뜨겁고, 여름부터 피기 시작한 루엘리아는 여전히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루엘리아를 보며, 늘 꽃으로, 열매로, 잎으로, 뿌리로, 향기로, 줄기 등으로 사람을 위로하고 먹여 살리는 온갖 식물들에게 한없이 고마운 마음을 보내며 가을맞이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