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내 그렇게 덥더니 10월이 되면서 그래도 선선해져 아침저녁으로 이불을 덮고 자야 하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식물들도 겨울이 오기 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슬슬 준비를 하죠. 벚나무는 벌써 단풍이 들면서 잎이 떨어지고, 은행나무도 노랗게 물이 들어가네요. 이런 때에도 꿋꿋하게 초록빛을 유지하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소나무나 잣나무와 같은 침엽수(바늘잎나무)들이 대부분인데요. 활엽수이면서도 초록을 유지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남쪽 따뜻한 지방에는 가시나무·동백나무·녹나무·아왜나무·먼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꽤 많죠. 중부지역 이북에서는 상록활엽수를 보기가 힘든데 그나마 우리나라 어딜 가든 만날 수 있는 상록활엽수가 바로 사철나무입니다.

사철나무는 말 그대로 사시사철 푸르러서 이름이 붙여졌는데요. 그 이름 때문에 많은 이들이 사철나무는 잎이 지지 않는다거나 꽃이나 열매가 안 달리고 잎만 푸르게 유지되는 것으로 알곤 하죠. 사철나무도 식물이므로 당연히 꽃이 피고 열매도 열립니다. 6~7월에 피는 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알아볼 수 있어요. 꽃대 끝에 꽃이 피면 그 아래에서 또 각각 한 쌍씩 작은 꽃자루가 나와 그 끝에 한 송이씩 꽃이 달리는 것을 반복하는 취산꽃차례로, 지름 약 7mm가량의 황백색 꽃이 조밀하게 달리는데요. 신기하게도 벌이나 나비는 잘 찾아오지 않아요. 냄새를 맡아봐도 별 향기는 나지 않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파리가 날아옵니다. 아마도 파리류가 좋아하는 성분이 나오는 것 같네요. 어떤 꽃이든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매개자는 있기 마련이니까요.
줄기에서 마주 나는 사철나무의 잎은 도톰합니다. 길이 3~7㎝ 정도의 타원형으로 반질반질한 왁스층이 발달해서 겨울에도 지지 않고 광합성을 할 수 있습니다. 추위에만 강한 것이 아니라 소금기가 많아 식물이 살기 어려운 바닷가에서도 잘 자라죠. 습지와 건조지대에서도 다 잘 자라기 때문에 웬만한 곳에서는 다 사철나무를 볼 수 있어요. 정원수로 가꾸거나 울타리에 심어 사철 내내 푸르름을 즐기기도 합니다. 짙은 녹색으로 광택이 나고 두터워 언뜻 보면 톱니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잎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나 있죠.

가을을 맞이해서 사철나무 열매도 익어갑니다. 사철나무가 속한 노박덩굴과 식물들의 공통점은 열매에 있어요. 참빗살나무·화살나무·참회나무도 노박덩굴과 나무인데, 노란색에 가까운 열매가 3~4갈래로 갈라지며 그 안의 선명한 주황색 씨앗이 드러납니다. 노박덩굴과가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는 비슷한 느낌의 열매를 달고 있죠. 사철나무 열매도 다 익으면 네 갈래로 갈라지며 안에 있는 네 개의 주황색 씨앗이 드러나죠. 특히, 10월이 지나 이듬해 1~2월에도 씨앗이 달린 경우가 많다 보니 한겨울에 먹이가 부족한 새들에겐 좋은 먹이, 좋은 양분이 됩니다. 물론 맛있게 먹은 새들이 어디론가 날아가며 배설하면 사철나무도 씨를 뿌리며 번식할 수 있어서 좋죠. 또 사람이 보기에도 겨우내 흰 눈 사이 초록 잎과 주황빛 열매가 달린 사철나무의 모습은 매력적이에요.

독도의 동도 천장굴 주변에는 수령 100년 이상의 사철나무가 자생하고 있답니다. 현존하는 독도 수목 중 가장 오래된 나무로 독도에서 생육할 수 있는 대표적인 수종이자 국토의 동쪽 끝 독도를 100년 이상 지켜왔다는 영토적·상징적 가치가 커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죠. 경상북도 역시 이를 보호수로 지정하고 ‘독도 수호목’으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는데요. 바다 한가운데 섬에 어떻게 사철나무가 자랐을까요? 구한말 울릉도의 어민이 가져다가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사철나무 열매를 먹은 새가 독도에 날아갔다 배설해서 자라게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타당해 보입니다.
사철나무에 꽃이 핀다는 사실도 잎에 톱니가 있다는 사실도 열매가 달린다는 사실도 멀리서 보면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자연은 한 발짝 다가가야 그 본모습을 보여줍니다. 한 해의 결실을 맞이하는 가을. 늘 가까이 있고 자주 보는 가족이나 친구들도 한번 더 들여다보고 챙겨주는 때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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