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한잠도 못 잤어요. 애들 앞날이 걱정돼서요."
지난달 말 후배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연금개혁이 화제에 올랐다. 그는 지난 4월 말 국회 연금특위 산하 공론화위원회 논의 결과를 듣고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공론화위원회는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더 내고 더 받는' 안을 더 지지했다. 후세대 부담을 더 높이는 안이었다. 40대 초반의 이 후배는 초등학교 1,3,5년생 자녀가 있다. 연금개혁이 늦어지면 애들이 보험료만 내고 나중에 연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후배는 "이런 식이면 초저출생이 이어질 터이고, 나라 소멸을 걱정해야 한다"며 "애들 미래를 위해 남편과 이민을 의논했다"고 말한다.
개혁 또 밀릴까 걱정 커져
지난주 중년의 선후배와 저녁 모임을 할 때도 연금 걱정이 나왔다. 이들은 자신의 노후연금을 걱정하면서도 후세대의 과도한 부담,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걱정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조치 때문에 연금개혁이 더 어려워지지 않을지 걱정했다. 10일 후배에게 다시 물어봤다. 그는 "탄핵 정국이 이어지면 두 명의 대통령(문재인·윤석열)이 연속으로 연금개혁을 패싱할 텐데, 정치권의 무책임이 원망스럽다"고 토로했다.
비상계엄 여파 개혁 불투명
하루 885억 적자 계속 발생
지체하면 제도불신 더 심화
"여야 합의만 하면 개혁 끝"
나라의 관심이 온통 대통령 탄핵과 하야에 쏠려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4대 개혁(교육·노동·연금·의료)에도 '계엄 꼬리표'가 붙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연금개혁은 달리 볼 필요가 있다. 특정 정권의 어젠다가 아니라 미래 생존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무너지고 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연금개혁의 당위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권과 관계없이, 정치 일정에 상관없이 오늘도 하루 885억원의 적자가 생긴다. 국민연금 제5차 재정계산에 따르면 2030년 보험료 수입보다 급여 지출(연금 지급액)이 많아진다. 보험료로 충당할 수 없으니 적립금을 헐어 써야 한다. 2041년 당기 적자가 발생하고 2056년 적립금이 고갈한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를 만들어 논의했고, 문 닫기 직전인 지난 5월 보험료를 9%에서 13%로 올리는 데 합의했다. 소득대체율(생애평균소득 대비 노후연금액의 비율)을 43%로 할지, 44%로 할지를 두고 이견을 보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통령의 틀기는 없을 듯
하지만 합의 직전 윤 대통령이 틀었다. 22대 국회에서 논의하자고 했고, 국민의힘은 모수개혁(보험료·소득대체율 조정)보다 갑자기 구조개혁을 들고 나왔다. 대통령 한 마디에 없던 일이 돼 버렸다. 그 이후 정부는 9월 '보험료 13%, 소득대체율 42%' 안을 제안했다. 지지부진하다 여야가 이달 초순에 연금특위를 구성하기로 했는데, 비상계엄 사태로 유야무야 됐다. 정국이 안정되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새 정권이 들어선다면 내년 하반기에나 내각이 구성될 것이다. 2026년 6월 지방 선거가 코앞에 닥치면 연금개혁은 또 뒤로 밀릴 게 뻔하다. 문재인 정부에 이어서 약 10년 허송세월하게 된다. 하루 885조원, 한해 32조원의 적자가 이어진다.
청년 세대의 연금 불신이 더 깊어갈 수밖에 없다. 연금개혁청년행동(이하 청년행동)이 지난 10월 ‘여론조사공정’에 의뢰해 만 18세 이상 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ARS 전화 방식으로 설문 조사했더니 20·30세대의 약 30%가 ‘국민연금을 폐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청년행동 손영광(33·울산대 전기공학부 교수) 공동대표는 "미래 세대의 빚을 어떡하든 줄여주는 게 연금개혁의 목표이다. 국민연금에 임의 가입해서 2000만원의 보험료를 내면 노후에 1억 2000만원의 연금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니 연금이 지속할 수 있겠느냐. 이걸 누가 부담하나, 바로 미래 세대"라고 지적했다.
"집권 눈앞 야당이 털고가야"
윤 대통령은 2선으로 물러났다. 조만간 더 밀릴 가능성이 크다. 지난 5월처럼 개혁에 제동을 거는 일이 없게 됐다. 이제는 권력이 야당 주도의 국회로 넘어갔다. 야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국회 관계자는" 탄핵 정국이라고 해도 연금개혁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며 "연금특위를 구성하기 어려우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연금개혁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야당이 곧 여당이 될 가능성이 큰데,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부담스러운 연금개혁 과제를 털고 가면 좋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21대 국회가 지난 5월 암묵적으로 합의한 '보험료 13%-소득대체율 43% 또는 44%' 안이나 정부안(보험료 13%-대체율 42%)을 토대로 하면 된다. 보험료는 1년에 0.5%p, 대체율은 0.05~0.1%p 올리는 것이다. 연금 지급 보장을 법률에 담고, 출산·군 복무 크레디트를 확대하는 안을 넣으면 된다. 자동재정안정장치(인구·성장률에 맞춰 연금액을 조정하는 것)나 연령별 보험료 차등 인상 방안(20,30대 인상률을 낮게 하는 것)이 들어가면 금상첨화이지만 이 둘은 다음에 논의하는 걸로 약속하면 된다.
권력 공백기에 개혁 과제를 완수한 경험이 있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 때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혁이 이뤄졌다. 84만 세대의 보험료가 올라가는 어려운 개혁이었으나 '공정 부담'이라는 큰 뜻이 우선했다. 국민연금도 마찬가지다. 현세대와 미래 세대의 공정 부담, 이만큼 중요한 가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