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귀환

2025-12-29

주주자본주의 발흥으로 한국에서 모험적 장기 투자 주체는‘국가’밖에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국가의 전략적 투자 결정은 어느 조직에서 담당할까? 신설될 기획예산처가 감당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국회 산하에 경제기획원이나 국가투자자문회의를 두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국가는 그런 걸 하면 안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5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소규모 토론에 참여한 적이 있다. 발제자는 경제민주화 전도사로 알려진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였고, 앞줄에는 나중에 문재인 정부에서 차례로 청와대 정책실장이 된 장하성 교수와 김상조 교수가 있었다. 나는 발제와 토론 과정을 보면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다들 한국 경제의 주요 이슈를 두루 짚으면서도, 산업 발전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역할, 특히 ‘산업정책’을 빼먹고 있었다.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내연기관을 전기차로 바꾸고 재생에너지 전환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해 장하성 교수의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산업정책은 ‘관치’이자 ‘개발독재’의 일부이며, 국가는 앞으로 특정 산업을 끌고 가거나 좌지우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에 김상조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참여연대와 경제개혁연대를 이끈 이들은 일정한 의미에서 시장주의자였다. 이들이 내세운 재벌개혁론의 핵심은 주주자본주의, 즉 재벌 총수가 ‘소유한 주식 지분만큼의 지배력’만 가지라는 뜻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시장질서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이를 교란하는 정부의 산업정책은 당연히 타도할 대상이었다. 장하성 교수의 사촌이자 사상적 맞수인 장하준 교수는 2018년 <나쁜 사마리아인들> 출간 10주년 기념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10년 전 한국 조선이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주고 이제 반도체 빼고는 중국이 다 추격했는데 반도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세계 최고 자동차 기업과 삼성, LG가 한국에 다 있는데 자율주행차 같은 것을 주도적인 산업정책으로 만들면 왜 안 되느냐.”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이던 장하성 교수는 이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바뀌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대놓고 산업정책을 이끌고 있다-때로는 보조금으로(바이든), 때로는 협박으로(트럼프). 미국은 앞으로 산업정책을 장기간 지속할 것이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 수단이자, 리쇼어링을 통한 고용 증대 정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완전히 달라졌다. 기존의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은 연구·개발(R&D)이나 세제 혜택 등 간접적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제 노골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소버린’ 인공지능(AI)을 추진한다. 엔비디아로부터 공급받는 GPU 26만장 중 5만장은 아예 정부 소유다. 9월에 발표된 ‘이재명 정부 123대 국정과제’에는 인공지능뿐 아니라 반도체·에너지·모빌리티·바이오·방산 등 분야별로 설정된 목표가 촘촘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무려 150조원의 국민성장펀드가 동원될 계획이다.

주주자본주의 시야 너무나 협소

국가와 자본이 한통속이 되는 체제. 정치경제학에서는 이를 ‘국가자본주의’라고 칭한다. 박정희의 정부 주도 산업화, 드골의 정부 지도(dirigisme)에 의한 ‘계획’들, 덩샤오핑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 최근 가장 주목받는 사례는 역시 중국이다. 중국의 개혁개방파는 한국을 벤치마킹해 강력한 산업정책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고, 그 결과 거의 모든 과학기술과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은 한참 동안 스스로 퇴물 취급했던 산업정책을 부랴부랴 손질하며 다시 시동을 걸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산업정책을 반대하고 ‘공정한 시장질서’를 외친 장하성 등의 주장이 수그러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의 후계자들이 요새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나 최욱의 ‘매불쇼’ 등에 출연하는 진보 패널들이다. 이들은 상법 개정, 배당소득 분리과세,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자본시장 선진화를 외친다. ‘회사의 주인은 주주’라든가, ‘삼성전자는 지금보다 배당을 늘려야 한다’든가, ‘진보도 돈 벌어보자’는 식의 발언을 스스럼없이 한다. 재벌의 부당한 지배구조를 타파하고 자본시장을 선진화하면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인 ‘코스피 5000’이 달성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가진 정치적 함의는 분명하다. 1400만명에 달하는 주식 투자자를 더불어민주당의 잠재적 지지집단으로 만들 수 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은 이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유권자 연합’이라고 부른 바 있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산업정책이 쇠퇴하던 최근 수십년 동안, 한국에서 ‘모험적 장기 투자’의 유일한 주체가 재벌이었던 것이다. 한국이 2차전지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LG그룹의 구본무 선대 회장이 20년 넘게 막대한 적자를 무릅쓰고 투자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현대차·기아가 최근 4년 연속 ‘세계 올해의 차’를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미래의 대세는 전기차임을 판단하고 대담한 투자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LG화학 물적 분할에 대한 소액주주들의 원성, 현대글로비스에 대한 추악한 ‘일감 몰아주기’는 이 같은 성공의 이면이다. 재벌의 모험과 재벌의 전횡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재벌들이 이런 ‘모험적 장기 투자’를 한 이유는 본인의 위신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였다. 롤모델은 삼성전자의 기틀을 세운 이병철·이건희 선대 회장이었을 것이다. 모험도, 전횡도 ‘이 회사는 내 것’이라는 의식의 산물인 것이다.

많은 문제 불구 그들이 승리할 듯

내가 주주자본주의에 우려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들이 시장주의자여서가 아니다. 이들의 시야가 놀랄 정도로 협소하기 때문이다. 본래 주주자본주의는 기업의 장기 성장과 잘 맞지 않는다. 몰락한 GE와 휘청이는 보잉이 이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한국의 재벌 대기업은 미우나 고우나 국민경제의 중추이고 글로벌 시장에서 더 큰 공룡들과 싸워야 하는데, 이런 점은 전혀 이들의 안중에 없다. 글로벌 밸류 체인에 편입되는지 여부가 기업과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와중에, 이들이 보는 시야는 완전한 ‘일국(一國) 자본주의’다. 물론 이들은 항변한다. ‘자본시장이 성장하면 모험적 장기 투자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하지만 미국의 자본시장은 한국의 20~30배에 달하고, 중국 정부의 기업 보조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전체 보조금 총합보다도 큰 규모다. 즉 한국의 기업들이 맞서야 하는 상대는 그냥 고래도 아닌 ‘슈퍼 고래’들이다. 한국 자본시장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통해 이들과 맞설 모험적 투자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들의 주장이 어불성설임은 한국에서 인공지능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면 알 수 있다. 2차전지나 전기차와 달리, 인공지능에는 붙을 만한 재벌이 없었다. 네이버는 한국에서 가장 앞선 인공지능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에는 인공지능 투자를 어쩌면 포기할 형국이었다. ‘슈퍼 고래’들은 인공지능 하나에만 수십조원씩 쏟아붓고 있는데, 2024년 네이버는 인공지능뿐 아니라 모든 영역의 연구·개발 투자를 다 합쳐도 2조원에 못 미쳤다. 네이버가 전형적인 재벌기업과 거리가 먼 회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합리적 경영자라면, 더구나 개정된 상법에 따라 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면, 슈퍼 고래들에 맞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국가’의 판단은 다를 수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한 가지만 꼽자면 인공지능은 향후 국방의 핵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전장은 인공지능 드론과 4족보행 로봇에 의존할 것이고, 징집자원이 점차 부족해질 한국의 미래에 인공지능은 핵무기와 함께 핵심적인 방위자산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주주자본주의는 승리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승리를 저지할 세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에서 모험적 장기 투자의 주체는 ‘국가’밖에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주자본주의의 발흥은 역설적이게도 국가자본주의의 강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전략적 투자 결정은 어느 조직에서 담당할까? 새해 신설될 기획예산처가 예를 들어 15년을 내다보고 양자컴퓨터에 몇조원을 투자하자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어려운 얘기다. 한국은 5년 단임제 국가이고, 기획예산처는 다음 정권에서 유지될지조차 알 수 없다. 게다가 초대 장관으로 내정된 이혜훈 전 의원은 정통 시장주의자에 가깝다. 차라리 국회 산하에 경제기획원이나 국가투자자문회의를 두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이범

서울대 학부에서 생물학, 대학원에서 과학사·과학철학을 전공했다. 박사과정 수료 후 수능 과학탐구 강사가 돼 ‘메가스터디’ 창업에 참여했다. 2003년 ‘일타강사’ 시절에 은퇴한 드문 기록을 갖고 있다. 이후 교육평론가, 정책전문가로 변신했다.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 민주연구원 부원장, 한겨레신문·시사인·허핑턴포스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지난 40년간의 한국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다. 저서로 <문재인 이후의 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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