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하려면 이해당사자 반발 극복하는 합의시스템 필요

2025-01-06

계엄·탄핵 정국에 휩쓸린 KDI 경제개혁 보고서

숨 가쁘게 이어진 계엄·탄핵 정국 탓에 의미 있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한 행사가 있었다. 지난해 12월 11일 ‘한국경제 생산성 제고를 위한 개혁방안’을 주제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개최한 콘퍼런스다. 급박하게 쏟아지는 계엄·탄핵 뉴스의 홍수에 아쉽게도 행사는 묻혀버렸다. 행사 당일 축사가 예정됐던 한덕수 총리도 참석하지 못했다.

“노동·자본 투입 성장은 한계…생산성 향상이 유일한 버팀목”

의사 등 자격면허제도 통한 인력제한 완화해 시장 경쟁은 살려야

근로시간 개편은 기본방향 유지하되 근로자 선택권 등 보완을

KDI는 이날 행사에 400쪽이 넘는 두툼한 보고서를 냈다. 다른 국책 연구기관 연구진과 대학교수들도 참여했다. 보고서는 성장률 둔화와 인구 고령화라는 도전을 맞은 우리 경제가 어떻게 하면 생산성과 경제의 역동성을 높여 성장을 이어갈 수 있을지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계엄·탄핵 정국이 지나고 대선 국면이 오면 어느 정부든 참고할 만한 제언들이 많이 담겨 있다. 조동철 KDI 원장은 개회사에서 “노동과 자본이라는 요소 투입에 의한 성장이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라며 “사회 전반의 생산성 향상이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고 했다. 콘퍼런스와 보고서 내용을 발췌, 정리했다.

#총론: 우리나라 생산성, 왜 낮은가

·조동철 KDI 원장, 남창우 KDI 연구부원장=우리나라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 달러를 달성했지만 경제성장 동력은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 노동과 자본이라는 생산요소를 투입하는 성장은 한계에 직면했고, 경제구조의 효율성을 보여주며 ‘창조적 파괴’로 대표되는 총요소생산성(TFP, Total Factor Productivity)은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다. 생산성 저하는 ①생산자원의 비효율적 배분 ②창조적 혁신의 둔화 ③미약한 사회자본 탓이다. ①의 원인은 규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경직성, 과도한 중소기업 지원정책 등이 생산요소의 효율적 이동을 제약해서다. ②는 사회이동성이 떨어지고 공교육이 약화하면서 인적 역량이 뒷걸음질 쳤기 때문이다. ③은 사법제도와 사업 환경이 취약하고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아서다. 왜 경제성장이 중요한가. 경제성장을 높여야 지역 간 성장 격차를 줄이고 상대적 빈곤을 개선해 사회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

생산성을 높이는 개혁이 지체되는 원인은 과거의 제도적·관습적 요인 등에 의해 자신의 생산성을 초과하는 경제적 보상을 향유해왔던 집단이 개혁에 반발해서다. 이들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클수록 개혁 추진은 어렵다. 일부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극복할 수 있는 합리적 합의 시스템을 형성해야 한다. 합리적 토론을 통해 이해관계자의 반대를 극복해나가는 성숙한 사회체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직접적 이해당사자들 못지않게 사회 전반의 소비자 혹은 수요자의 목소리와 이들의 이해를 대변할 전문가들의 의견이 경청될 필요가 있다.

#규제 혁신 전략

·양용현 KDI 규제연구실장, 김두얼 명지대 교수=신기술·신산업 발전을 위해 금지행위를 열거하는 네거티브 규제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여러 법체계와 부합하지 않아 급속도로 바꾸는 건 어렵다. 단기적으로는 새로운 법을 제정할 때 네거티브 규제체계를 우선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기존 법을 네거티브 규제체계로 전환하는 것은 장기적 과제로 돌리자.

신산업·신기술이 기존의 법령과 부합하지 않아 출시되지 못할 때, 일정한 지역·기간·규모 내에서 허용해 법령을 개선할 필요가 있는지 따져보는 규제 샌드박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규제 개선으로 이어지는 비율이 낮다는 점에서 보완이 필요하다. 법률 개정이 필요한 경우만을 예외로 인정하고 그 이외에는 1년 이내에 규제를 개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자.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해줘야 한다.

규제 관련 부처가 여럿일 경우 대통령실이 적극적으로 나서 조정해야 한다. 대통령실에 규제 조정을 담당하는 비서관을 신설하면 좋겠다.

의사·변호사 등 자격면허제도의 원래 취지와는 달리, 자격증 소지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선발 인력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현상을 완화하거나 철폐해 전문직 시장 내 경쟁을 통한 서비스 품질 제고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노동시장 개혁

·한요셉·김민섭·정수환 KDI 박사=고용안전망 강화가 필요하다.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 전일제 임금 근로 일자리 위주로 설계된 고용보험의 가입 및 수급 기준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보장성은 강화하면서 자발적 복직을 포함한 구직 유인은 높이기 위해 구직급여 수급액의 하한액은 낮추고 상한액은 높이는 조정, 가입기간에 따른 수급기간 상향, 조기재취업 수당의 개편 등을 추진하자.

해고 과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한국은 부당해고 판정 시 원직복직이 원칙이다. 이런 획일적 분쟁 해결방식은 무리한 원직복직 시도와 분쟁의 장기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대다수 OECD 국가처럼 사용자의 금전보상 신청을 허용하고 노동위원회의 직권에 의한 판단의 여지를 확대해야 한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개혁 시점 이후 새롭게 체결된 고용계약부터 새 기준을 적용하는 점진적 개혁방식(grandfathering)이 바람직하다.

최근 정부가 추진한 근로시간 개편안은 사용자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용자뿐만 아니라 근로자의 입장에서도 본인의 상황에 따라 주체적으로 근로시간 및 장소를 결정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다면 노동생산성이 제고될 여지가 있다. 정부의 기존 근로시간 개편안의 기본적인 방향을 유지하면서, 근로시간 선택권 확보 등 근로자 입장을 반영해 보완해야 한다. 연공성 완화 등 임금체계 개편은 공공부문에서 모범사례를 제시하고 고용보호와 근로시간 개편 등은 새로운 고용계약부터 보호 수준 및 근로조건을 변경해 적용하는 점진적 개혁방식을 제안한다.

#교육을 통한 사회 이동성 강화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GIST) 교수=사회 이동성 강화를 위한 정책은 생애 단계의 초기일수록 효과적이다. 무상 유아 교육·보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할 필요가 있다. 재정 부담과 인프라 확충시간을 고려해 우선 만 5세부터 실시하고 4세, 3세로 단계적으로 확대해 가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돌봄과 교육의 결합이 필요한 초등 저학년 시기의 공교육 역할을 제고해야 한다. 2021년 기준 한국 초등학교의 수업 시수(時數)는 연간 655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807시간)보다 훨씬 짧다. 아이가 일찍 하교하니 학원 뺑뺑이를 시키거나 부모가 퇴사나 근무 단축을 하게 된다. 아이가 받는 사교육은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 지역의 사교육 인프라 등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이것이 교육 격차를 발생시킬 수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수를 OECD 평균 정도로 늘리자. 지역 간, 계층 간 격차가 심한 영어교육을 초등학교 때부터 강화하고, 초등학교에서 제공하는 양질의 특기적성교육을 확대하자.

#중등교육의 자율화

·김이경 중앙대 대학원장=중등교육(중·고등학교)은 중앙집권적 교육행정체제 탓에 단위학교는 의사결정 권한이 부족하고 고령 교사 위주의 교장 임용제도의 한계로 학생 교육 혁신과 변화를 향한 활력이 부족하다. 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 학업성취도 평가가 폐지 혹은 축소되면서 학교·학생의 성취 등 개선에 필요한 교육성과를 판단할 정보가 없어졌다.

대학에 자율성을 주고 서술·논술형으로 대학 입시제도를 개선하자. 교장 자격증 소지자만을 대상으로 한 교장 공모제를 전면 시행하고 교육감 선거의 부작용 해소를 위해 시·도지사 러닝메이트제를 도입해야 한다.

#지역 균형 발전

·박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그간의 정책이 추구했던 ‘전국 시·군·구의 고른 발전’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광역시·도의 통합을 통해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협력을 극대화함으로써 광역시가 주변 권역의 허브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처럼 기업이 많은 지자체는 징수한 법인세의 낮은 비중을 배분받는 반면, 기업이 적은 지자체는 높은 비중을 배분받는 방식의 ‘차등공동법인세’를 도입해 지방정부의 재정자립도를 높이자. 토지이용규제에 관한 심의권과 결정권을 대폭 지방정부에 이양하고 중앙정부는 조정자 역할만을 수행할 것을 권고한다. 사실상 형해화된 ‘경자유전 원칙’에 근거한 농지규제를 폐기해 규모의 경제를 위한 농지임대차를 활성화하고, 획일적인 수도권 규제도 기업 수도권 진입의 비수도권 발전에 대한 영향평가제도로 대치해 규율하는 방식으로 과감히 바꿔보자.

#대기업 규율 합리화

·조성익 KDI 산업·시장정책연구부장=현재 대규모 기업집단(재벌) 규율은 사익편취 행위 근절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장기적으로 대규모 기업집단의 사익편취 행위 규율은 이사·소액주주·유가증권시장·기관투자자·M&A 시장 등 기업 내외의 이해관계자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외이사 독립성 강화, 증권 관련 집단소송 실효성 제고, 경영권 방어 수단의 재조정, 공시제도의 효과성 개선, 기관투자자 견제 기능 확보 등의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

#법치주의 강화

·김두얼 명지대 교수=우리나라 법률에서 형벌의 범위가 지나치게 늘어나는 현상, 즉 과잉범죄화(over-criminalization)를 제어하기 위해 입법부의 과도하고 즉자적인 법안 발의가 자제돼야 한다. 언론이나 시민단체는 국회의원의 법안발의 건수보다 질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의정활동을 평가하고 이것이 유권자의 선택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 법원 판결의 처리기간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음에도 항소율이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판사인력 증원보다 재판연구원(Law Clerk) 제도를 현실에 맞게 고치는 등 판사임용제도 개선에 무게를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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