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안전하고 몸집 작은 원전 개발 경쟁 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3일 ‘미국 원자력의 르네상스’를 선언했다. 그는 ▶원자력규제위원회 개혁▶에너지부의 원자력연구 개혁▶연방정부 토지 내 원전 건립▶미국 내 우라늄 채굴·농축 확대 등 내용이 담긴 4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은 2050년까지 원자력 발전 용량을 현재(100GW)의 4배인 400GW로 늘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신규 원전 건설·운영에 대한 심사는 18개월 내, 기존 원전의 가동 연한 연장은 12개월 내 승인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인공지능(AI) 시대 폭증하는 전력수요에 대응해 원전을 확대하기 위해선 규제를 풀어 ‘속도전’을 펼치겠다는 전략이다.
트럼프, 원전 발전 4배 늘리기로
미·러·중 등 80여종 SMR 개발 중
한국 설비·시공 능력 세계 최고
연 100조, 10만 고용 시장 잡아야
대선 공약 모호하거나 비현실적
정권 따라 바뀌면 경쟁력 떨어져
1979년 원자로 노심이 녹아내린 스리마일섬 원전사고 이후 반원전 운동이 극심해지자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원전 건설 중단을 선언해 70여개의 원전 건설계획이 무산됐다.

이후 미국은 원전 건설능력 약화, 원전 공급망 붕괴로 대형원전 건설역량을 잃은 상태다. 미국 조지아주 보글 3·4호기는 원래 2016, 2017년에 각각 가동할 계획이었으나 비용 급증과 건설 기간 지연으로 가동이 7년 뒤로 미뤄졌다. 건설비용은 당초 예상보다 두배 많은 300억 달러(42조원)가 들어갔다. 한국의 경우 새울 3·4호기에 9조 8000억원이 소요되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비용이다.
미국은 대형원전 건설보다는 소형모듈원전(SMR) 개발과 기존 원전의 가동 연장으로 방향을 선회한 상태다.
AI 전력소비 급증, 신재생으로 못 막아
반도체 공장, AI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린다. 2038년 경기 남부 반도체 클러스터가 완성될 경우 용인·평택·화성·기흥·이천에 15.4GW 이상의 전력이 필요하다. 데이터센터에도 현재 0.6GW보다 훨씬 늘어난 6.2GW가 소요된다.

문재인 정부는 탄소 중립계획을 발표하면서 2050년까지 전체 전력의 절반을 태양광으로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태양광의 경우 낮에만 발전이 가능한 ‘간헐성’ 때문에 에너지저장장치(ESS) 설치비용이 추가된다. 문재인 정부 계획을 실현하려면 1160GWh 용량의 ESS 설비를 구축해야 한다. 미국의 투자은행 라자드는 2023년 이 정도 용량의 ESS 설비를 갖추려면 48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간다고 추산했다. 또 화물용 컨테이너 크기만 한 ESS 116만개가 필요한데 땅값이 비싼 한국에서 부지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한국이 후진국에서 제조업 선진국으로 도약한 데는 값싼 전기료가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원자력이 절대적 공헌을 했다.

한국의 전기요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싼 편에 속한다. 버스요금이 1984년 120원에서 2020년 1300원으로 11배 오르는 동안 전기요금은 ㎾h당 67원에서 125원으로 고작 1.9배 올랐을 뿐이다.
원전에 반대하는 세력은 방사능 공포 등 안전성 문제를 내세운다. 지난 60여년간 전 세계 650여기 원전을 가동하는 동안 대형 원전사고는 단 세 차례 발생했다. 하지만 원전 사고와 직결된 사망자는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사고 때 43명뿐이다.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사고 때는 사망자가 없었다. 원자로가 녹는 중대한 사고였지만 견고한 격납건물이 누출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심각한 방사능 오염피해를 입었지만 직접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유럽공동연구소에서 원자력의 치명률을 계산한 결과 1조㎾h 발전 당 사망자는 0.5명에 불과했다.
가장 안전한 미래원전 SMR
대형원전은 원자로와 증기발생기·냉각펌프가 분리돼 배관으로 연결돼 있다. 원전 안전을 우려하는 이는 지진 등 외부충격으로 배관이 파손되면 냉각수 대량유출로 원자로가 녹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SMR은 노심·가압기·증기발생기·냉각재펌프 등을 강력한 격납고에 넣어 냉각수가 대량 유출될 위험이 거의 없다.
SMR의 안전성이 검증되면 대형원전처럼 부지 제약요건 없이 반도체 공장, AI 데이터센터 등 전력 수요지 인근에 설치할 수 있다는 특장점이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기준을 마련하면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는 지역에 SMR을 함께 설치할 수 있다. 법원·검찰청 유치를 원하는 지역에 혐오시설인 구치소를 포함시키는 방식과 비슷하다. 이 경우 막대한 비용과 갈등을 초래하는 송전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도 SMR 사업에 대거 뛰어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SMR기업 테라 파워를 설립했다. 현재 10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앞으로 수십억 달러를 더 쏟아부을 계획이다.
오픈AI 샘 올트먼도 SMR기업 오클로에 투자했다. AI 구동에 소요되는 전력을 위한 SMR을 2027년 가동할 예정이다.
아마존은 버지니아주 에너지기업인 도미니언에너지와 SMR 개발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구글도 SMR스타트업 카이로스가 가동하는 원자로에서 총 500㎿의 전력을 구매하기로 했다.
전 세계 원전 선진국들은 80여종의 SMR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가장 발 빠른 나라는 러시아와 중국이다.
러시아는 사용후핵연료 처리를 위한 300㎿급 SMR을 2026년 가동한다. 35㎿급 해양부유식 발전함과 55㎿급 원자력 쇄빙선을 이미 운행 중이다.

중국은 125㎿급 가압경수로형 SMR을 중국 하이난성 칭장지역에 건설 중이다. 중국은 이미 210㎿급 고온가스로형 SMR을 중국 산둥지역에 가동 중이다.
한국은 2012년 세계 최초로 110㎿급 일체형 가압경수로 SMR에 대한 표준설계인가를 받아냈다. 제일 앞서갔지만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폭풍과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이란 시련을 겪으며 러시아·중국·미국에 뒤처진 상황이다.
하지만 자본력과 기술력을 갖춘 대기업이 적극 참여해 한국형 SMR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 4세대 SMR인 고온가스로(HTGR) 설계사업은 원자력열 이용에 관심 있는 포스코E&C·SK에코플랜트와 함께 진행 중이다. 선박추진용 용융염원자로(MSR) 개발은 HD현대조선해양·삼성중공업·현대엔지니어링과 협업하고 있다.
한·미 원자력협력은 원전 부흥할 기회
원자력은 국가안보상 매우 민감한 에너지원이다. 미국 입장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아무리 좋은 기술로 값싸게 원전을 지어줄 수 있다고 해도 협력하기 어렵다.
미국의 ‘원자력 르네상스’는 한·미동맹관계로 묶여있는 한국에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다.
지난 2월 13일 최형두 국민의힘 의원은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원자력 협력방안 전문가 간담회’를 열었다.
이 모임에서 채택된 한·미 원자력협력방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의 우수한 원전기기 제작 및 건설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미국 원전의 전력생산단가를 내리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미국 가동 원전의 설비 개선에 한국기업이 참여하고, 중장기적으로는 한·미 합작회사를 설립해 미국 신규원전 건설시장에 공동 진출하는 계획을 담고 있다.
둘째는 양국의 핵연료 공급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미국에 건설 중인 우라늄 농축시설에 한국의 지분투자를 확대하고, 신규 우라늄 농축시설을 미국 또는 한국에 공동 건설·운영하자는 제안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탈탄소 친환경’을 에너지정책으로 공약했다. 탈원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원자력 발전비중을 유지하기 위한 투자엔 애매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원자력 발전비중을 60%로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역시 재원 조달, 공사 기간 등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공약이다.
신규원전 1기를 건설하려면 부지 확보기간을 빼고도 평균 12년 이상 걸린다. 정권에 따라 정책이 바뀌면 장기 투자와 인력 운용을 위축시켜 한국 원전의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지난 26일 대전광역시 한국원자력연구원을 방문했다. 세계 최초로 설계 인가를 받은 스마트 원자로 실물과 핵연료 처리시설을 둘러봤다. 조기 대선의 혼란 속에서도 연구원들은 세계 원자력의 부활에 희망을 품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임채영 원자력연구원 원자력진흥전략본부장은 “SMR이 전 세계 에너지산업의 대세가 되면 연 매출 100조원, 고용 10만명의 거대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며 “이를 위해선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과 인재 양성이 장기적·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