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냄의 미덕을 버린 종교

2025-10-27

봄에 뒤란 돌담 밑으로 해바라기 씨를 뿌렸는데, 세 송이만 온전히 살아 까만 씨앗을 맺었다. 둥근 원반에 빼곡히 들어찬 씨앗들. 나는 머리가 무거워 돌담에 기댄 해바라기 세 송이를 꺾어 옆지기에게 건넸다. 옆지기는 까만 씨앗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요 씨앗 하나하나가 새 삶이죠.” 그녀는 씨앗을 좀 더 말려 보관해야 한다며 해바라기 씨앗을 일일이 따서 작은 멍석에 펴 널었다.

푸른 잎과 황금빛 꽃을 잃고 잘 여물어 씨앗으로 남은 해바라기. 모든 생명이 그렇다. 봄여름이면 얻는 것이 많은 것처럼 보이고, 가을 겨울이면 잃는 것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자연의 생명들은 이런 얻음과 잃음의 순환의 여정에 순응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자연의 순환 질서에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렴풋하지만 오래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요즘 종교, 돈을 주인으로 섬겨

깨달음은 가진 걸 덜어내는 것

분노·탐욕·시기·질투 내려놔야

어떤 수도자가 오랜 수련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사람들이 수도자가 머무는 수도원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 많이 얻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수도자에게 물었다. “그래 당신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수도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얻은 게 없소. 오히려 잃었소. 셀 수 없이 많이 잃었소.”

수도자의 대답에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괜히 잘난 체하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주시오. 얻은 게 없고 도리어 잃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허허, 참. 그러면 내가 잃은 걸 얘기해 보겠소. 나는 무지와 환영, 모든 욕망을 잃었소. 또 나는 불행, 무의미, 절망, 분노, 비난, 탐욕, 정욕, 시기나 질투, 이런 것들을 잃었소. 나는 이런 것들을 모두 잃어 가난하오. 이것이 내가 깨달음을 통해 얻은 선물이오!”

많은 사람들은 종교가 소중하게 여기는 깨달음에 대해서 오해한다. 깨달음은 무언가 ‘얻는’ 것이라고! 그러나 수도자는 깨달음에 대해 ‘얻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잃는’ 차원의 것이라고 일러준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겨나는 것일까. 수도자가 갈파한 것처럼 우리의 무지와 환영, 끝없는 욕망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제도권 종교를 삼켜버렸다. 자본주의가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처럼 종교도 신이 아니라 ‘돈’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자기 삶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드물다. 무언가 ‘얻고자’ 하는 욕망에 삶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기 때문에, 비움이나 버림이라는 종교적 미덕에 쓸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최근에 보도되는 사이비 종교집단들의 범죄 행각을 보면, 그 뻔뻔함이 인면수심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한 종교의 수장이라는 자가 외국의 카지노에서 원정도박을 한 사실이 드러나자 휴식의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고 변명했다. 그가 도박에 투자한 어마어마한 돈은 신자들이 낸 헌금이거나 땀 흘린 노동의 대가가 아닌가. 그런 소중한 돈을 교주 개인의 욕망을 위해 탕진해도 되는가.

신은 덧붙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덜어냄을 통해서만 영혼 안에서 발견된다는데, 이처럼 덜어냄의 미덕을 멀리해온 종교가 세상에 정의를 마르지 않은 강처럼 흐르게 할 수 있겠는가. 중세 수도승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조상(彫像)의 비유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거장은 목재로 조상을 만들 때 나무에다 상을 새겨 넣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상을 덮고 있는 껍질을 깎아냅니다. 그는 목재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습니다. 다만 목재의 껍질을 벗겨내고 옹두리를 떼어낼 뿐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 감추어진 것이 환히 드러납니다.”

조상을 만드는 일도 그렇지만 우리 삶을 살리는 일에 봉사하는 종교의 바른 역할은 욕망의 깎아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깨달음을 얻은 수도자의 말처럼 얻음이 아니라 잃음에 있다는 것. 종교인의 명찰을 가슴에 착용하고도 덜어냄이나 잃음의 가치를 모른다면, 아직 깨달음에서 멀다. 에크하르트가 ‘감추어진 것이 환히 드러납니다’라고 한 것처럼, 우리가 얻음이 아니라 잃음의 가치에 눈뜰 때, 비로소 무지와 욕망의 환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늦가을 들판, 금빛으로 물든 벼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여물어가는 것들은 다 선한 빛을 갈무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난 스스로 묻는다. 덜어냄이나 잃음의 미덕을 마음 깊이 새기고 난 잘 여물었는가. 잘 여물어 이웃과 나눌 선한 열매가 있는가.

고진하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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