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우연히 읽은 신문 기사가 마음을 오래 붙들었다. 어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손편지가 붙었다. 그것은 갓난아기를 낳은 부부가 아이 울음소리에 불편을 겪을 이웃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편지글이었다. 예의를 갖춘 부부의 편지는 아름다웠고, 이웃들은 편지에 축하의 메시지를 가득 채웠다. 기사에는 이웃들이 남긴 메시지가 소개되었는데, 그중에서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한 구절을 만났다. 그것은 “우리 모두 울면서 자랐습니다”라는 문장이었다. 짧고 단순하지만 뜨거운 문장이었다. 어딘가에 숨어있던 나의 울음이 곧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태어난다는 건 세상에 울음을 들려주는 일이다. 우리는 울음소리로 세상에 나를 알렸다. 나의 존재는 울음으로 시작되었으니, 울음의 기원은 탄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배가 고프면 울고, 외로우면 울고, 아프면 울었다. 울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세상에 닿는 방식이었다. 밤이고 낮이고 시도 때도 없이 울며 자랐다. 그 울음에 누군가는 달려왔고, 누군가는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울음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울음은 생의 첫 언어이자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어느 순간 울음을 멈췄다.
울음을 참을 줄 알아야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른에게 울음은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관계에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이것을 울음의 구속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런데 문제는 단지 울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선가 여전히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도 참아지지 않는 울음이 있을 텐데,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듣지 않음으로 평화를 유지한다.
귀를 막고, 눈을 피하고, 모르는 척함으로 질서를 지킨다. 무관심은 생존의 기술이 된다. 울음이 멈춘 세상은 점점 조용해지고,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서로 멀어진다. 들리지 않는 울음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더 많은 사건을 만들어 내고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울음으로 매 순간 탄생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지금도 울음 속에서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고, 등을 두드려주며 살아가야 하는 어린, 어른들이지 않을까. 아이도 어른도, 아프고 배고프고, 외로우면 우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면 울고, 억울하면 우는 것이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라고, 태어날 때부터 울음을 지니고 왔을 것이다.
아이의 울음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마음으로 이웃의 울음을 들어줄 귀가 있으면 좋겠다. 어디선가 숨죽여 우는 사람들의 흐느낌이 잘 들리도록 그 귀가 예민하게 살아나면 좋겠다. 그래서 아무도 버려두지 않는 세상이기를. 아이 울음소리를 염려해 미리 이해를 구한 젊은 부부의 지혜와 축하의 메시지로 응답한 어느 아파트의 이웃들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더 나아가면 서로를 품으며 살아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어 본다. 층간소음보다 이웃의 울음소리를 듣는 귀가 필요한 시절이다. 날씨가 추워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나무의 뒤척임조차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바람이 몰고 온 소리에는 우리가 들어주지 못한 울음이 섞여 있는 것만 같다. 어디선가 울고 있을 사람들의 웅크린 등이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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