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정착한 발렌티나 “손녀 볼 생각에 설레”
“고려인도 차례상을 차려요. 세배도 똑같이 하고요.”
지난 23일 충북 제천시 청전동에서 만난 고려인 발렌티나(48)는 “설에 볼 손녀 생각에 명절을 맞는 기쁨이 더 크다”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인 발렌티나는 남편 알렉세이(50)와 5년 전부터 제천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다. 어머니 리다(73)와 딸 나타샤(25), 사위, 손녀가 모두 제천에 산다.
고려인은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광복 시기까지 농업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 이유로 러시아와 구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동포 또는 그 후손을 말한다. 밥과 김치를 먹는 식습관과 명절 풍습 등 한국 전통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발렌티나 가족도 이번 설에 차례를 지낸다.
음식은 우즈베키스탄에서 했던 것과 비슷하다. 통으로 삶은 닭고기를 놓고, 두툼한 햄, 중앙아시아식 찰떡, 삶은 계란, 사과를 준비하기로 했다. 여기에 귤과 바나나, 구운 생선, 김과 꼬치전을 곁들일 예정이다. 발렌티나는 “차례상을 차리고 술을 따른 뒤 다 같이 절을 한다”며 “세뱃돈 대신 덕담과 함께 과자를 선물로 준다”고 말했다.
차례상에 햄·생선·찰떡·꼬치전 올려
이번 설은 태어난 지 6개월 된 손녀 아멜리아가 함께한다. 발렌티나는 “제천은 조용하고, 인심이 좋아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며 “딸과 손녀가 주민들과 잘 어울리면서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고 했다. 발렌티나가 운영하는 식료품점은 고려인들이 즐기는 빵과 통조림·햄·과자·차·음료수·가공식품 등 50여 종을 판다. 오전 7시에 문을 열어 오후 10시까지 일한다.
발렌티나는 “오후 6시부터 저녁상을 차리려는 고려인이 많이 들른다”며 “빵을 직접 만들어야 해서 오전에 손님이 없더라도 가게에 일찍 나온다”고 했다. 진열대에는 직접 만든 대여섯 가지 빵이 놓여있었다. 큰 마름모 모양의 식빵과 고기빵·감자빵 등이 인기다. 발렌티나는 “중고생이 특이한 빵이라고 자주 사간다. 단골도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제천시가 2023년부터 10월부터 ‘고려인 이주 정착 지원’ 사업을 본격 추진하면서 가게를 찾는 고려인도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발렌티나는 “제천에서 일하는 고려인이 많아지면서 확실히 매출이 늘었다”며 “비자 연장이나 처리가 까다로운 민원 업무를 시에서 도와준다. 재외동포지원센터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으며 말도 더 잘하게 됐다”고 했다.
제천, 고려인 정착지원…500명 넘게 유치
제천시는 고려인 정착 사업을 인구감소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 정체성을 공유하는 고려인을 이주시키면 정착 가능성이 높고, 인력난을 겪고 있는 기업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이주 고려인들이 4개월간 무료로 머물 수 있는 단기체류시설(재외동포지원센터)을 설립한 데 이어 취업과 거주지 알선을 돕고 있다. 센터 거주 기간이 끝나면 제천 지역에 집을 구하고 살아야 한다.
지난 15일 기준 현지적응 교육 후 제천에 완전히 이주한 고려인은 91세대 226명이다. 이주를 진행 중인 사람은 120세대 323명으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러시아 출신이 많다. 이들 중 30~40대가 47%(258명)다. 미취학 아동과 초·중·고 학생은 27%(150명)나 된다. 김영중 제천시 미래전략팀 주무관은 “청년층과 학생 비율이 높다 보니 장기적으로 인구 증가에 보탬이 될 것으로 본다”며 “기업체에서도 한국 문화에 익숙한 고려인과 함께 일하는 게 다른 외국인보다 편하다는 말을 한다”고 했다.
의료비 할인·보육료·장학금 혜택
제천에 온 고려인은 다양한 혜택을 받는다. 미취학 자녀에게 보육료 30만원을 지원한다. 초·중·고 자녀 둔 가정은 제천인재육성재단을 통해 장학금 50만원을 준다.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면 장학금 100만원을 준다. 시는 비자 연장이나 ‘지역특화형 비자’ 전환 업무를 대행하고, 수수료를 면제해 준다.
관내 3개 종합병원에서 의료비 20%를 할인해 준다. 이주 첫해 약값 등 의료비 20만원을 준다. 체류시설 입소 전 제천시가 나서 관내 기업체에 취업을 알선하고, 공인중개사와 함께 거주지도 알아봐 준다. 김창규 제천시장은 “인구 증가와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청년 고려인 유치에 더 힘쓰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