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위 쿠데타 진압으로 민주공화를 재단장하자

2025-01-13

87년 체제는 공화를 사장시킴으로써 주권과 권력 과점의 격차를 조장했다. 그 폐단은 내란 정국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특히 공동체 구성원의 자유와 권리, 책임과 의무를 조화하면서 공공성으로 연결할 수 있는 ‘시민의 덕성’에 주목해야 한다

딱 1년 전이다. ‘민주공화는 대동세상의 현재이자 미래’라는 취지의 칼럼을 1월30일자 이 지면에 썼다. 민주와 공화가 붙은 민주공화라는 말의 한국에서의 기원과 내용을 정리하면서 약해지고 있는 공공성을 강화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해 다시 쓸 줄 몰랐다. 12·3 친위 쿠데타의 잔불이 꺼지지 않고 있어서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자, 다들 화재 원인을 조사하고 처벌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바람을 타고 다시 시커먼 연기가 피어나고 메케한 냄새까지 진동하고 있어서다. 자칫하면 공동성(common)과 공적인 것(public)을 종합한 공공성이 크게 훼손되거나 완전히 무너질 우려가 있는 상황이다. 만약 그리되면 민주공화, 특히 공화의 부재로 이어져 승자, 강자, 다수의 독점과 패자, 약자, 소수의 배제로 구체화할 것이다.

민주와 공화가 만나다

조선 왕조 때 공화는 화평, 안정, 단합을 함축한 말로 쓰이며 대동과 같은 의미였다. 또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함께하려 하는 경우를 묘사하는 문장에 등장하는 말이었다. 신문물이 밀려온 개항 이후에는 republic을 공화국, 공화정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국인(國人)의 공화하는 정체’의 대표 국가로 미국을 꼽았다. 그래서 공화정체를 합중정체(合衆政體)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합중정체에서 말하는 공화는 조선 왕조 때의 함의와 근본에서 다른 점이 있었다. 군주 대신에 대통령이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일정한 기한이 있고 모든 일을 군민이 공치(共治)하는 공화였다. 국민주권에 입각한 선거제와 권력기관을 견제하는 의회제에 주목함으로써 에토스의 측면보다 정부형태 또는 정치체제로서 공화에 더 주목했다. 그랬기에 1910년 8월 이전까지만 해도 공화정체는 반역의 정치체제였다.

1910년 한국병합으로 황제의 절대주권이 소멸하자, 독립운동 세력은 국민주권을 전면화했다. 그들은 ‘대동단결 선언’을 통해 8월29일이야말로 ‘황제권이 소멸하고 민권이 발생한 때’라고 창조적으로 의미를 규정하면서 ‘구한국 최종의’ 날이자 ‘신한(新韓) 최초의’ 날로 간주했다. 그러면서 융희 황제가 주권을 포기하고 ‘우리 국민 동지’에게 암묵적으로 주권을 넘겨주었으므로 독립운동 세력이 ‘대통(大統)을 상속할 의무’가 있다고 능동적으로 보았다. 우리는 제국에서 민국으로 이어지고, 오늘의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을 잇는 징검다리 논리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국민 개개인의 민권을 중시하는 민주주의가 여러 사람의 권력체인 공화정과 접목하고, 평등으로서 대동과 만나며 민주공화제로 제도화했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구분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똑같이 주권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으로 지배자를 견제하는 세상이 사회의 대동이었다. 서로 화평하고 단합해 똑같은 권리로 정사(政事)를 협의하는 움직임이 정치의 대동이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의정원은 ‘임시헌장’에서 이러한 공화와 대동을 선거제와 의회제라는 장치의 설정으로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했다. 민족 내부를 향해서만 말하지 않고 민족의 평등과 인류의 평등을 구현하겠다고도 ‘정강’에서 밝혔다.

반장선거와 같은 경험도 없었던 독립운동 세력이 민주공화를 자신들이 실현할 미래 세계이자 독립운동의 지향점으로 신속하게 상정할 수 있었던 데는 우리만의 독자적인 경험과 내적 사유(思惟)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동법과 같은 공동선(善)을 지향한 정책이나 정여립의 대동계와 동학농민군의 집강소처럼 공동체에서의 누적된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대동사상은 이러한 정책과 저항 경험의 바탕이었다. 망국 이후 독립운동 세력은 대동사상에 서구의 근대 관념을 접목시키며 유교 민본주의를 극복해 갔다. 가령 그들은 배타적 주권론에 그치지 않고 주권의 평등성까지 제기했다. 세계 각국은 선거권과 피선거권 자격에서 경제력과 성(性)이 여전히 중요한 요건이었지만, 1919년 시점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요건을 부정했다.

그럼에도 민주공화 이념은 한국인이 직접 실천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기본원리가 아니었고, 일제강점이란 상황에서 제대로 실험 한번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강고한 실천원리로 작용하지 못했다. 서구에서처럼 자유·평등·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한 시민혁명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독립운동 세력도 가치의 측면에서 ‘정체’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문구 수준의 ‘정체’에 관해서만 특별히 주목했다. 그래서 정치사상과 일상의 뿌리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공화가 방치되다

해방 이후 현대사에서도 허약한 뿌리를 튼실하게 만들 기회가 없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가 격렬하게 갈등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분단체제가 고착화했다. 이에 민주공화보다 반공이 우위를 점하는 이념이 되었다. 항일투쟁과 전혀 관계없던 부일협력자들은 민주공화를 상상해본 적도 없으면서 대한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반공에 기생했다. 그들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장기 독재에도 편승했다. 이에 비해 독재를 반대하는 세력은 반독재 민주화에만 온 신경을 모았다.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여력이 없었다. 더구나 북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내세웠다. 박정희 독재를 뒷받침한 민주‘공화’당도 18년 가까이 있었다. 독립운동 세력의 ‘공화’와 전혀 다른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공화가 한국 현대사에서 유통된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며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민주화운동 세력이 정치운동의 영역에서 벗어나 대중의 다양한 사회·경제 이해를 대변하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1987년 6·10민주화운동은 그러한 움직임을 결정적으로 폭발시켰다. 대중운동의 공개 영역에 대동세상, 대동세계라는 말이 다시 등장했다. 한국 사회에서 군인이 더 이상 정치에 개입할 수 없는 세상도 되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임시헌장의 제1조가 68년 만에 부활한 헌법이 제정되고 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민주공화의 일부가 부활한 것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대통령 선거 8회, 총선 10회가 있었다. 8명의 대통령 당선자가 기록한 득표율은 전체 유권자의 34.03%에 불과했다. 모든 대통령 당선자가 거의 3분의 2의 유권자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87년헌법은 제왕적 대통령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작년에 실시된 22대 총선 때 지역구 출마자들이 획득한 득표율을 보면 더불어민주당 50.5%, 국민의힘 45.1%였다. 그 결과 지역구에서만 민주당은 161석, 국민의힘은 90석을 얻었다. 그런데 두 정당의 득표율 격차는 5.4%포인트에 불과한데 의석수는 71석이나 차이가 났다. 1988년 이후 총선에서 득표율보다 과다한 의석수를 획득하는 현상은 매번 있었다. 국민의힘 계열이 10차례 총선 가운데 7회 더 민주당 계열보다 득을 봤다.

이렇듯 87년체제가 만든 대의제 민주주의는 국민의 주권을 항상 왜곡해왔다. 지금까지 소수 주권으로 승리를 독식하고, 이와 다른 다수의 주권을 짓눌러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반복되어온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화가 민주 뒤에 붙이는 접미어에 불과하며, 민주공화도 민주주의의 다른 말로 간주했다. 결국 87년체제는 공화를 사장(死藏)시킴으로써 주권과 권력 과점(寡占)의 격차를 조장했다. 임시헌장의 제1조가 말하는 민주공화에 대해 설명한 교과서가 지금까지 없었을 정도로 한국 사회는 민주와 공화의 관계에 주목하지 않고 방치해왔다.

87년체제의 폐단은 내란 정국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12·3 친위 쿠데타와 그 우두머리의 언행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두 대통령 권한대행도 국회가 의결해 통과시킨 특검안에 대해 다시 여야 합의를 종용하며 결정을 포기했다. 비선출 권력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와 ‘법의 지배’를 부정함으로써 공화의 작동을 막은 것이다. 위기에서는 부작위의 위험부담이 작위의 위험부담을 압도하는데도, 두 사람은 기회주의 보신(保身)으로 위기의 리더십을 포기했다. 두 사람에게서는 위기의 리더십에서 요구하는 역사관, 곧 독립운동과 민주화를 향한 희생과 노력의 과정에서 다 같이 쌓아온 민주공화의 역사를 소중히 하고 깊게 새기는 역사관을 발견할 수 없다.

탄핵으로 가는 헌재의 일정은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성급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막연하게 상상해본다. 평시의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어느 순간에도 ‘법의 지배’가 관철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공동체 구성원의 자유와 권리, 책임과 의무를 조화하면서 공공성으로 연결할 수 있는 ‘시민의 덕성’에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민주공화의 함의와 깊이를 역사 속에서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시민의 덕성과 연결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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