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6일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씨는 여느 날처럼 일기장을 펼쳤다. 그날 아침에 동네 부면장이 찾아와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전한 터였다. 김씨는 저녁 라디오 방송에서 건국위원장에 안재홍, 대통령에 김구, 총리대신에 이승만, 외무대신에 여운형, 육군대신에 김일성 등이 취임하기로 결정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일제 35년의 압박에서 벗어난 지 이틀째, 김씨는 “밤에는 자리에 들어도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내 마음 흥분했을까”라고 썼다. “병중의 아내가 너무 기뻐서 떡과 술 준비를 하느라 밤늦게까지 애쓰는 것이 고맙기도, 불안스럽기도 하다”라고 적었다. 그는 이튿날 이렇게도 썼다. “노래도 하고, 만세도 부르고, 내 일생 중에 가장 기쁜 하루가 아닐까. 이것이 꿈이라도 좋을 것인데. 하물며 생시이랴.”
김씨는 해방의 감격에만 취하지 않았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다. “기뻐 날뛰는 것만이 우리의 능(能)이 아니다. 하루바삐 훌륭한 나라,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를 만들도록 모든 우리가 힘써야 할 것”(8월 19일)이라고 적었다.
여기서 김씨는 1950년 6·25 당시 한국인의 고통을 중도적 지식인의 눈으로 촘촘하게 기록한 일기 『역사 앞에서』를 남긴 김성칠 전 서울대 사학과 교수다. 1993년 첫 출간된 『역사 앞에서』는 해방공간 및 한국전쟁기 사회상을 증언하는 사료이자 지금도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다. 1945년 12월에서 이듬해 4월, 1950년 6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의 일기가 들어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전편에 해당하는 ‘해방일기’가 새로 발견됐다. 김 교수가 1945년 8월 16일부터 11월 29일까지 해방 직후 한국의 일상을 촘촘하게 기록했다. 지금껏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 교수의 아들이자 역시 역사학자인 김기협(75)씨가 어머니 이남덕 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1920~2012)의 유품에서 최근 찾아냈다. 아들 김씨는 32년 전 『역사 앞에서』 또한 어머니가 보관해 오던 원고를 찾아 단행본으로 엮었다. 김씨는 중앙일보에 “지난해 10월 말, 오랜만에 목포 둘째 형님을 찾아뵈었는데, 형님께서 ‘이건 네 일거리 같다’며 두툼한 공책을 건네주었다”고 말했다. 200자 원고지로 600매가 넘는 분량이라고 한다. 그는 이어 “『역사 앞에서』의 대부분은 6·25 이후의 기록이니, 이로써 1945년 8월~1946년 4월의 ‘해방일기’와 1950년 6월~1951년 4월의 ‘전쟁일기’ 두 파트가 완성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2025년 올해는 해방 80년을 맞는 해다. 새로 찾은 ‘해방일기’의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분단과 전쟁이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잉태한 해방정국의 혼란과 욕망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진다. 해방 당시 충북 제천군 봉양면 금융조합 이사로 재직했던 김 교수는 일기 곳곳에 한국인의 실력 배양과 교육 증진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한글의 우수성을 거듭 강조하고 문화적 독립을 가장 중요한 건국 과제로 꼽았다. 격변기 속 남북 분단에 대한 우려도 빠뜨리지 않았다.
예컨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 실력 함양에 힘쓰고 함부로 경거망동 말자”(8월 23일), “이 어려운 과도기에 우리 겨레끼리 상잔상해(相殘相害)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9월 7일),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공연히 날치는 축들”(9월 16일), “이조 5백년의 모든 죄과를 세종대왕의 한글 하나로 능히 보상하고 남음이 있다”(10월 10일), “조선은 정치적·종교적으로 남에게 예속될지라도 우리 마음가짐에 따라선 문화적으로 언제든지 완전한 독립국일 수 있다” 등이다.
실제로 김 교수는 1946년 말부터 1947년 초까지 쉽고 유려한 한글로 해방 후 최초의 대중적 통사이자 베스트셀러인 『조선역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역사 앞에서』 개정판(2009)을 해제한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새 일기는 해방 직후 정치·역사적 상황은 물론 필자와 가족·친구들의 관계를 주관적·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도 “김 교수의 문제의식은 8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했다.
※‘김성칠의 해방일기’는 오는 4일부터 매주 토요일 중앙일보 홈페이지(www.joongang.co.kr)에 공개됩니다. 필자의 아들이자 역시 역사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김기협씨의 설명도 함께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