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박정희] (9) 소년 박정희 -1편…지독하게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나, 총기는 ‘동네 제일’

2024-10-10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171번지

금오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의 끝집

금오산 산세, 부처님 누워있는 와불상

조선 초 무학대사 “군왕이 날 산” 예언

술만 마시며 가정에 무관심했던 부친

딸과 함께 임신·노산 부끄러웠던 모친

낙태하려 민간요법 동원했지만 허사

1917년 11월 14일 ‘세상의 빛’ 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라는 말처럼 우리 스스로 역사를 올바로 알아야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과거 불가변성(不可變性)의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할 것인가. 개인이든 사회이든 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중요하다. 올바른 역사적 평가 위에 현재가 바로 설 수 있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역사의 올바르지 못한 평가 즉, 왜곡된 평가는 개인과 사회를 황폐화시킨다.

역사는 오늘의 상황적 관점이 아닌 그 역사 당시의 상황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박정희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제강점기, 8.15광복, 분단, 6.25전쟁, 4.19혁명, 세계 최빈국 등 격동(激動)의 세월을 관통한 그 시대 인물에 대해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도외시하고 단편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역사바로세우기가 아닌 역사왜곡이며 역사부정이다.

‘보수·우파’는 박정희를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일구어 낸 근대화의 기수로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다. ‘진보·좌파’는 독재자로 시련과 아픔을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이분법을 벗어나 이 땅의 ‘산업화 세력’은 근대 산업국가로서의 초석을 다졌고 ‘민주화 세력’은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의미 있는 작업에 모두 충실하였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면서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보완할 것은 보완하는 지혜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박정희가 걸어온 길을 같은 색의 안경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다만, 그가 어떤 세월을 걸어왔는지 제대로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러한 일환으로 그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소년 박정희》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박정희(朴正熙)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171번지 금오산(金烏山) 기슭에서 태어났다. 구미는 산남수북(山南水北, 금오산 남쪽 낙동강 북쪽)의 산자수명(山紫水明,산은 자줏빛이고 물은 맑다)한 곳이다. 이 고을을 내려보는 금오산은 보는 사람, 보는 위치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보이는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다.

금오산 동쪽 선산에서 보면 멧부리가 마치 붓끝처럼 보인다고 ‘필봉(筆峰)’으로 불려왔다. 남쪽 칠곡 지방에서 상봉을 바라보면 귀인이 관을 쓰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귀봉(貴峰)’, 또는 거인이 누워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거인봉(巨人峰)’으로도 일컬어진다. 어떤 이는 금오산 산세가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와불상(臥佛像)’이라고 했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고을을 지나다가 금오산을 바라보고는 “군왕이 날 산”으로 예언했다고 한다. 박정희가 태어난 집은 상모리 마을 앞에서 바라보면 동북쪽의 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의 끝집이다. 뒤로는 멀리 금오산을 등지고 나즈막한 두 개의 산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새 둥지처럼 보이는 형상이다.

박정희는 아버지 박성빈(朴成彬, 46세),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45세) 사이의 7남매(5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정희가 태어날 당시, 장남 박동희(朴東熙, 22세), 차남 박무희(朴武熙, 19세), 장녀 박귀희(朴貴熙, 15세), 3남 박상희(朴相熙, 11세), 4남 박한생(朴漢生, 7세), 차녀 박재희(朴在熙, 5세)가 있었다. 그 때 큰 형 동희와 둘째 형 무희는 결혼을 했고, 큰 누나 귀희도 결혼을 해서 정희가 태어나던 해에 딸을 낳았다.

박정희는 고령 박씨(高靈朴氏)이다. 고령 박씨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아들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을 시조(始祖)로 하는 신라왕족(新羅王族)의 후예(後裔)이다. 박정희는 고령 박씨 직강공파(直講公派)로 조선 영조 때 문신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잘못된 제도와 탐관오리를 단죄하는 데 앞장섰던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1691~1756)의 후손이다.

아버지 박성빈은 성격이 호방하고 체격도 좋았다. 조선 말에 효력부위를 지낸 무장이었으나 조선 말기 탐관오리의 횡포와 백성들의 고난을 보고 동학운동에 가담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난 뒤에는 날개가 꺾이고 말았다. 이후 가사에는 관심이 적었고 술 마시는 일로 소일하면서 가산을 거의 탕진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안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고향 성주를 떠나 처가 수원백씨(水原白氏)들과 인연이 있는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로 이사 왔다. 이 해가 박정희가 태어나기 전 해인 1916년이었다. 여덟 마지기(1,600평)의 처가 위토(位土,제사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의 처지라 많은 식구들이 하루 세 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상모리는 가난한 초가 90여 채가 여섯 개의 작은 마을로 나뉘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당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넉넉지 못한 마을이었다. 그 중에서도 박정희의 집은 가장 가난했다.

박정희가 태어나던 1917년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 하에서 암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시기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국권을 상실한 우리 민족은 가난과 빈곤, 실의와 좌절, 울분과 통한 속에서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이 어두운 시대에 박정희는 뱃속에서부터 많은 시련을 겪으며 태어났다.

◇ 박정희의 일생은 출생부터가 사투(死鬪)

박정희를 임신했을 당시 아버지 박성빈은 거의 가사에 무관심하고 출타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양가의 규수로 태어난 백남의는 출가 전까지는 고생이라고는 별로 모르고 자랐다. 출가 후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생활이 궁핍하여 어려운 형편에 자식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하나 더 생겨 식구가 늘어난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다. 며느리 둘을 본 그녀는 큰 딸 귀희도 임신을 했는데, 늦은 나이인 45세에 딸과 함께 임신을 했다는 것도 부끄럽게 생각했다.

백남의는 아이를 지우기 위해 당시 민간에서 전해오던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간장을 한 사발 마시고 앓아 눕기도 하고, 밀기울(밀을 빻아 체로 쳐서 남은 찌꺼기)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라치기도 했다. 섬돌(집채의 앞뒤에 오르내릴 수 있게 놓은 돌층계)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쳐 보기도 했다. 아무리 해도 안 되어 수양버들의 뿌리를 마셨는데, 정신을 잃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뱃속의 아기가 더 이상 뛰놀지 않았다. “이제 됐구나”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자 또 뱃속에서 아기가 발길질을 해댔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깔려도 보았다. 그녀는 허리를 못 쓸 정도로 다쳤는데 뱃속 아기는 여전히 뛰놀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낙태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녀는 “ 하는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싸서 아궁이에 던져 버려야겠다”고 작심하고는 낙태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처럼 태어날 수 없는 생명이 될 뻔한 아기가 세상의 빛을 본 것은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 오전 11시경이었다. 당시 노산(老産)이 부끄러워 최대한 조용히 낳으려 했다. 그런 어머니의 바람과는 다르게 정희가 태어났을 때는 그 울음 소리가 너무 커서 동네 전체에 울렸다고 한다. 그녀는 출산을 한 당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로 우렁찬 울음 때문에 동네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러 다녔다고 한다. 동네 어르신들은 “마을에 장군감이 태어났구만”하며 이해 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사투 끝에 막내 정희는 태어났다. 태어난 이후에도 사투는 이어졌다. 이미 6명의 아이를 낳은 어머니 백남의는 젖이 말라 나오지 않았다. 정희는 모유를 먹지 못하고 자랐다.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멀건 죽 같은 것을 숟가락으로 떠 먹였다. 그게 우유 대용이었다. 변비가 생겨 힘든 적도 많았다. 다행히 정희의 큰 누나 귀희가 정희 출생 한 달 전 딸을 출산했다. 정희는 때때로 큰 누나의 젖을 얻어 먹고 자랐다.

박정희가 남다른 사생관(死生觀)을 가진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년 시절부터 정희는 이순신 장군의 말 즉,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

훗날 박정희는 여순반란 사건 이후 1949년 군 내 남로당 조직 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뒤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등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의 총탄이 육영수 여사를 쏘았다. 여사가 총탄에 맞아 병원으로 실려 간 뒤에도 대통령 박정희는 연설을 계속했다. “여러분,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연설을 이어 나갔다. 그의 모습에서 당황하거나 겁먹은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에 맞은 뒤에도 “난 괜찮아”라고 말하며,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을 걱정했을 정도였다. 박정희는 이처럼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정희 두 살 때 어느 날, 정희가 기어 다니다가 문지방 아래로 굴러 떨어져 뻘건 화로에 쳐 박혔다. 시뻘건 숯을 온 몸에 뒤집어 썼다. 정희의 큰 형수와 큰 누나가 이를 발견하고 정희의 얼굴에서 숯을 털어내고 입속에 들어간 숯을 끄집어냈다. 이에 정신이 쏠려 정희의 양쪽 저고리 소매에 불이 붙어 타 들어가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급하게 저고리를 찢어 불을 껐다. 양쪽 팔뚝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아버지는 황토를 물에 짓이겨 상처에다 바르고는 베 조각으로 감아 놓았다. 화기가 빠지자 한 달 만에 겨우 딱지가 남았다. 그 때의 화상 흉터는 정희가 성인이 되어서도 남아 있었다. 박정희는 소매가 짧은 옷을 잘 입지 않았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다. 어린 시절 정희는 남들보다 정서적으로 지적으로 비범했다. 네 살이 된 어린아이가 일이 끝나고 온 어머니의 이불을 따뜻하게 해 놓는가 하면, 네 살 때부터 다녔던 서당에서 천자문, 사자 소학을 끝내고 형들의 책들을 줄줄 읽었다고 한다. 여섯 살 때던 해 정희가 여덟 살 된 옆집 형의 숙제를 봐주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정희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배우게 해야 겠다” 라고 결심을 했다. 동네 사람들 또한 “정희를 잘 키워라, 정희는 보통 인물이 될 아이가 아니다”라며 정희를 응원해주었다고 한다. 똘똘한 아이 정희는 어머니의 사랑과 동네의 관심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며 자랐다.

◇ 병약하고 작은 키, 그리고 가난했던 아동기

정희는 구미보통학교 저학년 시절 자주 체증을 앓았는가 하면 발육부진을 겪었다. 도시락이 겨울에는 얼어 찬밥을 먹었다. 체해서 가끔은 음식을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음날 아침밥을 먹지 못하고 학교에 가기도 하였다. 이럴 때마다 어머니 백남의는 걱정을 하였다. 그 당시 시골에는 소화제라고는 없었다.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면 이웃집의 침장이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침을 맞았다. 이상하게도 그 침을 맞으면 체증이 낫는 것 같았다. 성인이 된 후에도 왼손 엄지 손가락에 침을 맞은 자국이 남아서 빨간 반점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보통학교 학적부 기록을 살펴보면, 보통학교 6년 동안 129.9Cm에서 135.8Cm로 겨우 5.9Cm만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주 체증을 앓았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미보통학교 6학년 때인 1931년 박정희 소년의 키는 135.8㎝, 몸무게는 30㎏, 가슴둘레 66.5㎝로 발육상태 평가는 병(丙)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 청와대에서 가끔 “ 우리 형제들은 다들 체구가 건장하고 키도 큰 편인데 나만 체구가 작다. 어린 시절 40리 길을 걸으면서 얼어붙은 도시락을 먹고 자주 체하곤 했으니 키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라고 말하곤 했었다. 이 말에서 작은 키가 열등감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 박성빈의 키가 대략 1m70㎝ 정도였고 셋째 형 박상희가 아버지 박성빈보다 약 10㎝가 더 컸다고 하니 박정희의 집안사람들은 기골이 컸다고 할 만하다. 어머니 백남의는 정희의 왜소한 키가 어릴 적 잦은 병치례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신의 낙태 노력과 모유를 제대로 주지 못한 후유증이라 생각하고 늘 마음 아파했다. 발육이 부진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소년 정희는 다른 형제들은 가지 못하는 보통학교를 자신이 간다는 데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이는 다른 형제들에게 음식을 양보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렇듯 어렸을 때 제대로 못 먹었기 때문 영양실조로 인한 발육부진은 당연하다 하겠다.

빈농의 아들이었던 박정희는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인 중에 가장 가난하게 살았다. 구미보통학교 시절, 늘 일등으로 성적이 우수하고 급장(반장)이었지만 그는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다. 바로 지독한 가난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80%가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정희에게 가난은 냉혹한 현실로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정희에게 어린 시절 가난은 특별하게 기억된다.

당시 한 달 월사금(수업료)이 60전이었다.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농촌에서 매월 납부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정희의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생기면 모아 두었다. 때로는 쌀을 몇 되씩 팔아서 모아 두었다. 정희의 형, 누나들이 달라면 없다고 하며 알뜰히 모아 두었다. 월사금을 낼 때면 정희의 어머니는 한푼 두푼 모아둔 1전짜리 동전, 5전, 10전짜리 주화를 궤짝 구석에서 찾아내어 그의 손에 쥐어주곤 했다. 가정은 곤궁했으나 정희는 월사금을 체납하지 않았다.

학용품을 살 돈이 없는 날에는 정희의 어머니는 그의 손에 돈 대신 계란을 몇 개 떨어진 양말짝에 싸서 주곤 했다. 계란을 학교 앞 문방구점에 들고 가면 주인이 계란을 이리 저리 흔들어 보고 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한 후 계란 1개에 1전씩 쳐서 연필이나 공책(노트)과 교환해 주었다. 이 계란을 들고 가다가 비오는 날이나 얼어서 빙판이 된 날 같은 때는 미끄러져 넘어지면 계란이 팍삭 깨어져 버린다. 이런 날은 하루 종일 정희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정희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면 계란을 깨었다는 꾸지람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안쓰러운 눈길로 “ 딱하지, 넘어져서 다치지나 않았느냐” 고 할 뿐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주위의 세상과 충돌을 일으켜 실패하게 되면 마음속에 패배감을 갖게 된다. 이때 어머니의 태도는 절망과 희망을 판가름하는 관건이 된다. 넘어져서 속상해 하는 정희에게 어머니의 꾸지람이 아닌 아이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위로는 정희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이는 훗날 패배의식에 찌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이어졌으리라.

점심시간에 정희의 도시락을 열면 언제나 ‘서숙쌀’이라고 불리던 좁쌀에 보리가 절반쯤 섞인 밥이 담겨 있었다. 보통 아이들은 보리밥에 쌀이 좀 섞이기도 했는데 정희는 좁쌀이 많아 단번에 가난한 집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이런 도시락도 싸오지 못한 날도 많았다.

어느 여름 하루, 정희는 배가 몹시 고파 서둘러 집으로 갔다. 사립(사립짝을 달아서 만든 문)을 들어서면서 큰소리로 "어머니!" 불러보지만, 집안엔 아무도 없었고 씁쓸함만이 배어 나왔다. 정희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서 솥뚜껑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무말랭이나 장아찌라도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빈 솥을 보는 순간 마음이 한풀 꺾였다. 할 수 없이 찬장에서 간장통을 꺼내 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다.

어느 해 추석 전 날이었다. 학교에서는 추석 명절이라고 오전 수업만 하고 학생들을 집으로 보내 주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떡을 치고 전 부치는 구수한 냄새가 온 마을을 진동했다. 정작 정희가 집에 들어서자 전혀 음식을 장만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날의 냉랭한 정경이 잊혀 지지 않는다.

정희에게 어린 시절 가난한 삶이란 마치 한 자락 옷 한 벌 걸치지 못한 벌거숭이 어린 짐승처럼 모든 것이 부족하고 결여된 체 세상에 내던져진 듯 싶었다. 정희는 인생행로를 따라가면서 겪게 되는 고난 중에 가난하고 배고픈 설움이 무엇보다 고달프다는 것을 거듭 깨달아갔다.

훗날 대통령 박정희는 공식적인 연설에서 “가난은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로 가난한 과거를 회상했다. 어린 시절 정희의 배고픔과 가난에 대한 뼈아픈 경험은 후에 단군 이래 5천년 가난의 굴레인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처음으로 우리 민족에게서 배고픔과 가난을 몰아내는 원동력으로 승화되었으리라. 단순한 배고픔과 가난에서 해방이 아니라 찌든 가난 속에 억눌렸던 민족적 트라우마를 ‘하면 된다’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정신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민족적 자긍심을 높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한강의 기적’은 지구상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단기간에 눈부신 초고속 경제 성장을 실현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조선, 철강, 기계,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등 중화학 공업의 눈부신 발달, 인터넷, 고속도로, 공항, 항만 등 사회 간접자본의 축적, 그리고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하는 등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로 변모시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의 질을 높였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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