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서울의 시간속으로 시민의 궁으로 돌아오다

#광해군의 건축과 인왕산의 품-백승기
경희궁(慶熙宮, 옛 이름 경덕궁 慶德宮)은 조선 후기 서울에 세워진 다섯 궁궐 가운데 서쪽에 자리한 궁이다.
지금은 대부분이 훼손되었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서울 도심 속에 남아 조선 정치사의 흥망을 전한다. 경희궁은 광해군 9년(1617)에 창건이 시작되었으며, 당시 이름은 경덕궁이었다.
그러나 영조 36년(1760)에 정원군의 시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희궁’으로 개칭되었다.

궁이 자리한 곳은 오늘날 서울 종로구 새문안 일대로, 도성의 서쪽에 위치해 ‘서궐(西闕)’이라 불렸고,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이라 여겨 새로운 궁을 짓기로 결심했고, 정원군의 옛 집터를 중심으로 궁궐을 조성했다. 공사는 1617년에 시작되어 1620년 무렵 완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 경덕궁은 정전·동궁·침전·별당을 비롯해 약 1,500칸에 달하는 건물로 이루어진 대규모 궁궐이었다. 건물 배치는 다른 궁과 달리 정남향이 아닌, 외전과 내전이 좌우로 나란히 놓인 독특한 구조를 보였다.
이러한 배치는 전통적인 궁궐의 중심축 질서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광해군의 독자적 정치관과 왕권 의식이 반영된 결과로 평가된다.
광해군은 그러나 끝내 이 궁에서 머물지 못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면서, 그가 세운 궁은 새 왕조의 임시 법궁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후 창덕궁과 창경궁이 화재로 소실되자 경덕궁(경희궁)은 국왕의 거처로 기능하며 조선 후기 궁궐 운영의 한 축을 담당했다. 경희궁의 역사는 한 왕의 몰락에서 다른 왕조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순환과 시대 변화를 품은 공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인왕산의 품, 왕기의 숨결
경희궁은 인왕산의 품 안에 자리한다. 서쪽의 인왕산이 궁궐을 감싸고, 남쪽으로는 한강의 물길이 멀리 보이며, 동쪽으로는 경복궁과 청와대가 이어진다.
조선의 도성 체계에서 인왕산은 서쪽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며, 수도를 수호하는 상징이었다. 광해군은 이 산의 기운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산과 궁의 경계는 완만하게 이어졌고, 바위와 숲이 자연스럽게 담장 역할을 했다.
광해군이 이 터를 선택한 이유는 풍수적인 이유나 왕권의 상징이기도 하였지만 ,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적 철학의 표현이었다.
그는 자연의 기운 속에서 왕권의 정당성을 찾고자 했다. 인왕산의 바위 능선은 마치 왕권을 수호하는 방패처럼 뻗어 있었고, 궁의 중심인 숭정전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인왕산의 정기를 받아들이는 형국을 이루었다. 풍수적으로 보아 경희궁은 ‘산이 감싸고 물이 멀리 도는’ 이상적인 명당이었다.
지금도 경희궁 돌담길에 서면 인왕산의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바람이 궁터를 스친다. 사라진 왕의 숨결이 돌담 사이로 스며드는 듯, 자연과 권력이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다.

#왕의 새로운 궁, 불안한 시작-윤재민
경희궁은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이 세운 궁궐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고 정권의 중심이 흔들리자, 광해군은 새로운 왕궁을 지어 왕권을 공고히 하려 했다. 그는 조선의 수도 한양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인식을 갖고, 서쪽에도 균형을 이루는 궁궐을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선택된 자리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신문로 일대, 인왕산 자락 아래였다. 경희궁의 건립은 1617년에 시작되어 1620년에 완공되었고, ‘경희(慶熙)’라는 이름에는 나라의 태평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다.
그러나 그 화려한 시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완공 직후 인조반정이 일어나며 광해군은 폐위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가 세운 궁은 역설적으로 새 왕조 권력의 출발점이 되었다. 인조는 반정 이후 잠시 이곳을 거처로 삼았지만, 이후 창덕궁을 법궁으로 삼으며 경희궁은 정치적 중심에서 멀어졌다. 경희궁은 ‘폐위된 왕의 궁’이자 ‘새 왕의 궁’이라는 양면의 운명을 지닌 공간이 되었다.
왕권의 불안과 권력의 교체가 동시에 새겨진 이 자리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굴곡을 상징하는 장소로 남았다.

#반정의 기억과 소멸의 시간-김세용
인조반정 이후 경희궁은 점차 조선 왕실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효종과 숙종, 영조, 정조에 이르기까지 일부 왕이 이곳을 머물렀으나, 창덕궁과 창경궁이 주요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경복궁은 임진왜란 이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본격적인 중건은 19세기 고종 대(1865~1867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이 시기까지 경희궁은 주로 임시 궁궐이나 외국 사신 접대용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경희궁의 훼손은 결정적이었다.
1908년 일제는 궁궐 부지를 강제 수용하고, 조선총독부 관청과 일본인 관사, 학교를 세웠다. 궁의 전각은 대부분 해체되어 자재로 재활용되었고, 궁의 상징인 숭정전만이 남았다. 이마저도 일제에 의해 이축되어 다른 장소에 옮겨졌다가, 1980년대 복원되어 제자리를 찾았다. 광해군이 세운 궁궐은 이렇게 도시의 구조 속에 흩어졌지만, 그 터는 여전히 권력의 흔적을 품었고, 이는 이후 조선 왕권의 몰락과 함께 식민 권력. 나아가 근대 행정의 중심이 되는 과정 속에서도 여실이 드러났다.
경희궁은 도시 권력의 흐름을 기록하는 공간이 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의 돌계단과 남은 초석 하나에도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심 속 짧은 돌담길은 시간이 남긴 상처이자, 권력의 부침을 조용히 증언하는 기억의 벽이다.

#사라진 궁, 다시 열린 공간-고개희
광복 이후 경희궁터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1946년 3월 5일 서울고등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왕이 정사를 보던 자리가 젊은 학생들의 배움터로 바뀌었다. 왕권의 상징이 교육의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이후 1980년대 서울고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일부 궁터 복원이 추진되었다. 같은 시기 인근에는 현대그룹 본사가 세워져 또 다른 권력의 시대가 열렸다. 왕의 궁이 산업 권력의 중심으로 바뀌었고, 경희궁 일대는 한국 근현대의 힘의 지형을 보여주는 공간이 되었다.
오늘날 경희궁은 서울역사박물관과 맞닿아 시민의 휴식처로 자리하고 있다.
복원된 숭정전과 홍화문은 과거의 위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궁 안의 산책로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길이 되었다. 인왕산의 그림자 아래, 과거의 궁궐이 현재의 도시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사라진 왕의 궁이 이제는 시민의 궁으로 돌아온 셈이다.

■경희궁을 거닐며-이상훈 연세대 교수
경희궁은 서울의 역사 속에서 왕권의 탄생과 몰락, 식민의 상처와 근대의 변화를 모두 품은 공간이다. 광해군의 야심에서 출발해 인조의 반정, 일제의 훼철, 현대의 재생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언제나 ‘권력의 자취가 남은 터’였다.
그러나 오늘날 경희궁은 더 이상 권력의 공간이 아니다. 시민이 걷고 머무는 열린 궁, 도시의 기억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변했다.
경희궁을 거닌다는 것! 그것은 도시의 시간을 걷는 일이며, 사라진 권력이 어떻게 시민의 일상 속으로 환원되는가를 체험하는 일이다.
경희궁에는 왕권의 흔적과 시민의 일상이 한 풍경 속에 겹쳐진다.
궁의 돌담은 더 이상 권력을 구획하는 경계가 아니라, 시간을 잇는 길이 되었다. 경희궁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기억이자, 권력의 흔적이 시민의 일상으로 녹아든 상징적인 공간이다. 폐허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난 시작이었다.
인왕산의 바람이 지나가고, 서울의 빌딩 숲이 그 위로 겹쳐질 때, 우리는 한 궁궐의 흥망을 넘어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서울의 얼굴’을 보게 된다.
경희궁은 지금, 그렇게 다시 살아 있다.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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