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호주 - 재정검증 거친 실현 가능 공약
의회예산처가 정책 비용 분석 공개
정치인과 소통… 실현 가능성 구체화
국민도 예산 설계 과정에 참여 기회
민간 호주연구소는 공론의 장 확대
유권자 체감 예산 분배효과 등 검증
이해관계 벗어난 필수의제 띄우기도
‘첫 주택 구매자는 집값 5%만 내고 살 수 있는 주택 최대 10만채 공급.’
지난 5월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가 노동당의 재집권을 위해 발표한 총선 공약이다. 얼핏 보면 집값 문제를 해결할 묘수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간단하지 않다. 호주 의회예산처(PBO·Parliamentary Budget Office)는 이 공약을 이행하려면 2028년까지 정부 투자금 약 27억호주달러(2조5200억원)를 줄여야 한다고 추산했다. 겉보기에 좋은 공약도 실제 비용을 생각하면 실행이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호주는 선거 공약의 정책적 실현 가능성을 재정적으로 따져보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공약을 숫자로 바꾸는 예산추계 제공
선거철마다 정당과 정치인은 공약을 쏟아내지만 현실성 검증은 뒷전이다. 호주에서는 PBO가 공약의 검증자 역할을 맡고 있다. 세계일보는 지난달 24일 호주의 수도 캔버라 도심에 있는 PBO 사무실을 찾았다. 국회의사당 ‘팔리아멘트 하우스’ 건물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자 PBO 사무실이 보였다. PBO는 의회 독립기관으로서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터뷰에 참여한 직원 이름은 공개하지 않는 방식을 요청했다.
PBO 처장 직무대행을 맡은 관계자는 준비해온 발표자료를 화면에 띄워 “유권자인 국민이 정책의 재정 효과를 알 수 있도록 각종 공약과 정책 비용을 분석해 공개한다”고 기관의 역할부터 설명했다. 선거 뒤에는 정책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추계한 선거 공약 분석 보고서도 발표한다.
정당과 의원은 PBO에 정책 시행연도, 대상 등을 상세히 알린 후 정책 비용 추계를 요청할 수 있다. PBO 관계자는 “이 과정에서 정치인과의 소통을 반드시 거친다”고 강조했다. PBO는 받은 자료로 연도별 재정 현황을 분석한다. 그는 ‘2025년 선거 공약이 정당별 기초 현금 잔액에 미치는 영향’ 그래프를 보여주면서 2025년부터 2036년까지 잔액 적자가 늘어나는 흐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분석 결과는 의원 동의 시 홈페이지에 공개해 유권자 누구나 볼 수 있다.
의원들은 PBO 보고서를 활용해 정책 논의에 나선다. 지난 2월 프라란주 보궐선거를 앞두고, PBO는 “평균 임차인이 소득의 20%를 모아 보증금을 마련하려면 10년이 걸릴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에 녹색당 가브리엘 드 비에트리 의원은 “세입자가 보증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PBO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비용을 계산하는 기관에 그치지 않고, 국민이 직접 예산 시뮬레이션을 해볼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PBO 관계자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유권자도 예산 설계 과정을 직접 실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권자가 정책의 재정 실현 가능성과 가까워지게 하는 민주주의적 장치인 셈이다. 가장 유명한 도구는 ‘나만의 예산을 세워보세요(BYOB·Build your own budget)’다. 정부가 구직 지원금을 올린다면 세입·지출이 어떻게 바뀌는지 등을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관계자가 BYOB에 예산을 임의로 입력하자 하락세를 그리는 예산액 그래프가 화면에 나타났다.
BYOB가 총수입과 지출 등 거시적인 예산 시나리오를 손쉽게 실험할 수 있는 도구라면, ‘호주 대표 납세자 소규모 모델(SMART·Small Model of Australian Representative Taxpayers)’은 소득구간별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BYOB는 5년간 추가 지출이 얼마나 드는지를 보여준다. SMART는 소득 상위 10%는 평균 200달러 혜택을 받지만, 하위 30%는 평균 10달러 정도만 변한다는 등 세부 정보를 알 수 있다.
호주 언론도 예산추계 도구를 활용해 유권자가 이해하기 쉽게 보도한다. 지난 총선 때 인터넷 매체 ‘가디언 오스트레일리아’는 BYOB를 활용해 “해외 이주 인구 감소 정책을 도입하면 정부의 현금 잔액이 누적 240억달러 감소할 것”이라고 전했다.
PBO는 정책 비용 추계를 전문가만의 영역에서 벗어나 국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정책 실험의 장’으로 확장했다. 정책 예산을 추계하는 역할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유권자가 접근하기 쉬운 제도를 만들기 위해 고민한 결과다.

◆숫자 뒤 맥락 짚는 ‘호주연구소’
호주는 시민사회에서도 예산에 대한 관심이 높다. 민간 정책 싱크탱크 호주연구소(The Australia Institute)의 빌 브라운 민주주의·책임 프로그램 국장은 PBO 설립 이후 국민이 정책 예산 제도를 신뢰할 수 있었다고 짚었다. 지난달 25일 캔버라 인데버 하우스 건물 1층에 있는 호주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PBO가 공약을 비용화해 선거 문화를 바꿨다면, 우리는 예산으로 민주주의 토론의 폭을 넓히고 있다”고 했다. 정치영역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예산추계를 PBO가 메우고 있다고 봤다.
예산 액수만큼 예산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빌 국장은 “우리는 단순히 수치를 넘어 예산이 어떤 사회 구조와 가치관을 반영하는지 본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PBO가 소득세 인하 공약이 세수를 줄인다고 분석한다면, 호주연구소는 고소득층·남성·도심 거주자가 실제 수혜자라는 점을 보여준다. 유권자가 체감할 수 있도록 예산의 분배 효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정치영역에서 ‘표심’을 신경 쓰느라 미뤄뒀던 의제에도 주목한다. 빌 국장은 “정치인은 유권자와 지역구의 눈치를 보지만, 호주연구소는 특정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구체화한다”고 말했다. 정책 수혜자가 적어 정치영역에서 언급되지 않지만 필요한 정책이라고 판단될 경우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PBO와 호주연구소의 역할은 다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정치인이 책임 있게 정책을 추진하고, 시민의 정책 참여를 확대하는 것. PBO가 정치영역과 제도 안에서 책임 정치 틀을 만든다면, 호주연구소는 그 결과를 국민에게 알기 쉽게 전해 공론장을 넓힌다.
호주의 예산추계 시스템은 단순히 공약 검증과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예산추계 도구, 정당과 의원 대상 교육, 시민 친화적 해석 등. 숫자와 해석이 민주주의를 신뢰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셈이다. 한국도 책임 있는 정치를 위해 공약의 예산추계 의무화를 고려해 볼 때다.
※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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