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미래신문)
월듀란트는 “역사는 생물학의 한 조각이다. 인간의 생명은 육지와 바다에서 유기체들이 겪는 온갖 우여곡절의 일부라고 했다. 지난날의 우여곡절인 역사적 일을 새삼 되세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잊혀진 역사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필자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우장춘 박사와 같은 식물육종학자다. 그는 채소육종으로 6 · 25 전쟁 이후 어려운 우리나라 농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등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인으로서 그의 역할은 한계가 있었다. 우장춘과 대비되는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고영근이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시해된 날이다, 그곳에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이다.
1895년 10월 8일은 친러정책을 주장하는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에 의해 시해된 날이다. 이른바 을미사변(일본 작전명 : 여우사냥)이다. 을미사변은 2005년 공개된 일왕의 자료(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작성)에 의하여 일본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우범선은 경복궁 옥호루 살해 현장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을미사변 후 1896년 1월 서울에 처와 두 자식을 남겨두고 우범선은 도일(渡日)하여 결혼하여 1898년 아들 우장춘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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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1월 24일 고영근은 우범선을 살해한다, 그는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망명 7년째 되던 해 일본으로 찿아 간 고영근에 의해 4년간의 철저한 준비와 추적 끝에 무참히 암살되었다. 고영근에 의해 살해된 우범선은 명성황후가 시해될 때, 경복궁 옥호루를 지키는 경비 대대장이었다. 고영근은 우범선을 살해한 후 일본 법정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적의 목을 베다,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라고 살해 이후 심정을 밝혔다. 일본 법정의 판결문에 의해 그의 행위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 후 고종의 이토 히로부미에 한국 송환을 간청하여 8년여의 형을 마치고 1911년 출소하였다. 15년간의 모진 고난의 시간을 마치고 귀국하여 고종 승하 후 1921년까지 남양주 금곡의 홍릉(고종과 명성황후 무덤)을 지키는 능참봉에 임용되어 일하다 물러 난후 병으로 죽게 된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그 발밑에 뼈를 묻었다고 역사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그의 묘는 수원시 장안구 야산에 외로이 잠들어 있다. 이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고영근의 행위가 자객(刺客)으로 역사에서 평가 절하되고 있다. 자객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을 몰래 죽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신의 역사적 평가에 대하여 고영근은 지하에서 얼마나 통탄하고 있을까?
고영근이 왜 자객인가?/ 역사적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 자녀들에게 부끄럽다
조선총독부는 우범선 사후 20여 년간 그의 두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했다. 우장춘은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를 받았다. 1950년 3월 한국으로 와 1959년 여름 숨질 때까지 한국인과 결혼하여 우리나라 농업발전에 기여했다. 우 박사는 수원시 권선구 구 농촌진흥청 자리가 있었던 여기산 중턱에 잠들어 있다. 우장춘 박사의 묘는 수원시와 농촌진흥청에서 잘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역사적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고영근의 묘는 수원시 장안구 야산 언덕에 있다. 조그만 돌에 ”고영근 지묘(高永根 之墓)‘라 표시되어있다. 국가(지자체)에서 관리하는 화려한 우장춘 박사의 묘와 비교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국난의 시대에 고영근의 15년에 걸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의미가 재평가되어 우국지사로서, 그의 무덤이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는 홍릉으로 이전 관리되는 것도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학자 비스마르크는” 지혜로운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말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기성세대는 무엇를 가르칠것인가? 고민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