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얼굴 된 ‘신라의 미소’, 내 식탁에서 웃음 짓네

2025-09-05

경주의 어느 절터 흙 속에 천년 넘게 잠들어 있던 작은 기와 한 조각이 있었다. 흙먼지를 털어내니 드러난 얼굴은 무섭지도, 위엄 넘치지도 않았다. 위로 들린 입꼬리에 봉긋해진 광대뼈, 살짝 내민 눈동자와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아이 같기도 하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이웃 같기도 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누구든 마음 한구석이 환히 밝아졌을 것이다.

그 기와는 바로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인 ‘얼굴무늬 수막새’, 우리가 흔히 ‘신라의 미소’라 부르는 유물이다. 원래 수막새는 지붕 끝을 막아내는 장식 기와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 험상궂은 도깨비나 맹수의 얼굴을 새겨 악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 수막새는 겁을 주는 대신 웃음을 택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처럼, 신라인들은 웃음이야말로 ‘세상을 지키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 특별한 미소는 한동안 우리 곁을 떠나 있었다. 일제강점기 경주에서 활동한 일본인 의사가 수집해 일본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 얼굴은 오랜 세월 낯선 땅에 걸려 있었고, 소장자에게는 아끼는 진열품이었지만 우리에겐 잃어버린 문화유산이었다. 다행히도 1972년에 박일훈 국립경주박물관장의 간절한 노력과 옛 스승 오사카 긴타로의 중재, 그리고 소장자 다나카 도시노부의 결단이 더해져 38년 만에 고향 경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흙으로 빚어진 단 하나의 미소가 제자리를 찾던 날, 많은 이의 가슴이 뭉클해졌을 것이다.

수막새에는 장인의 손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 얼굴의 틀은 찍어냈지만 눈과 입은 손끝으로 눌러 완성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는데, 그래서 양쪽 눈과 광대뼈가 미묘하게 비대칭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살아 있는 듯한 표정이 완성되었다. 완벽하지 않기에 더 자연스럽고, 그 자연스러움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보는 이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고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늘날 이 미소는 더 이상 경주의 상징에 머물지 않는다. 오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APEC 2025 KOREA의 공식 엠블럼에 얼굴무늬 수막새가 담기면서, 천년 전 흙으로 빚어진 웃음이 아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협력과 평화의 얼굴로 되살아났다. APEC은 세계 21개국 정상들이 경제와 기술, 문화를 논의하는 국제 협력의 장이다. 그 무대에 신라의 미소가 등장한다는 것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는 경주가 지닌 천년의 역사와 웃음으로 세상을 대했던 신라인의 지혜가 국제사회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경주를 찾는 각국 정상과 방문객들은 회의장 곳곳에서 이 미소를 만나게 될 텐데, 이 온화한 웃음은 서로를 향한 환대와 화합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하게 될 것이다. ‘적대가 아니라 환영으로, 긴장이 아니라 대화로 맞이하자’라는, 신라가 남긴 철학이 오늘의 국제회의 현장에서 다시 빛나는 셈이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의 상품 브랜드 ‘뮷즈’ 역시 이 미소를 현대인의 일상 속으로 불러오고 있다. ‘신라의 미소 우양산’은 기와 끝에 수막새가 놓여 있는 듯 디자인되어 있어, 햇볕 아래에서 펼치면 마치 신라 건축물 아래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동시에 외부의 나쁜 기운까지 막아주는 상징성도 느껴진다. ‘신라의 미소 파우치와 키링’은 수막새의 둥근 외형과 질감을 최대한 살려, 손에 쥘 때마다 천년 전 장인의 웃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식탁 위 소스볼, 냉장고 마그넷 속에서도 이 미소는 순간순간을 환하게 밝히며 우리의 삶에 스며들고 있다. 일상적인 도구 하나가 천년 전 미소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박물관에서 만난 유물이 가방 속과 식탁 위로 들어와 나와 함께 웃고 있는 셈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갈등과 긴장이 많다. 신라의 장인은 무섭게 으르렁거리는 얼굴 대신 해맑은 웃음을 택했다. 그 미소는 지금도 말해주고 있다. 진심 어린 웃음과 환대야말로 서로를 이어주는 가장 큰 힘이라고.

김미경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상품사업본부장. 문화유산에 오늘의 감성을 더하는 브랜드 뮷즈(MU:DS)의 총괄 기획을 맡고 있다.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등 국립중앙박물관을 ‘굿즈 맛집’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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