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자 특정하는 ‘RE100 산단’…에너지고속도로와는 상충

2025-12-14

‘재생에너지 100% 사용 산업단지’ 법안의 문제점

에너지고속도로는 이재명 정부 에너지 정책의 트레이드 마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압도적 꼴찌인 국내 재생에너지 보급률을 제고하고 청정에너지 체제로 전환하는 데에 중요한 인프라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재생에너지를 100% 사용하는 산업단지(‘RE100 산단’)가 끼어들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일각에서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내 국가산단에 2031년 입주 예정인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서남권 ‘RE100 산단’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러한 주장은 에너지고속도로의 의미와 재생에너지의 특징, 전력 시장과 RE100의 관계에 대한 무지에 바탕을 둔 주장이거나 아니면 특정 지역과 특정 재생에너지 기업을 염두에 둔 주장이라는 의심을 키운다.

에너지고속도로 패러다임 전환 속

재생에너지 전력 이동망 시동

에너지 신도시 개념 ‘RE100 산단’

에너지 정책 청사진과는 엇박자

전력 시장 개방, 전기료 정상화 등

전력 거버넌스 재구축 선행돼야

에너지고속도로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동차 고속도로와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지난 대선 기간에 민주연구원이 발행한 ‘에너지고속도로 10문 10답’에 있는 이한주 민주연구원장의 인사말을 살펴보자.

‘에너지고속도로는 단순한 송전선로가 아니다. 전국 에너지 시스템의 뇌이자 심장 역할을 하는 복합 네트워크다. 전력 흐름을 안정시키는 계통 안정화 설비, 먼 거리도 끊임없이 잇는 고성능 장거리 송전선로, 전력 사용이 몰릴 때 에너지 흐름을 저장하고 조절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서해를 가로지르는 최첨단 해상 초고압직류송전(HVDC) 그리드, 그리고 지역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분산에너지 인프라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대한민국 에너지의 미래를 그리는 종합 설계도가 바로 에너지고속도로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려면 전력시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재생에너지가 등장하기 전 원자력과 화력 발전이 주도하던 전력 체계에서는 ‘발전→송전→배전→판매’가 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국가와 공기업(한전)이 함께 수요를 예측해 설비를 확충하고 전기를 공급하는 계획 발전이 가능했다. 한전은 경제 급전 원칙에 따라 전력 원가가 낮은 전기부터 발전했다. 전기요금도 시장에 맡기기보다 물가와 경제 정책을 고려해 규제해왔다.

전력 시스템 유연성 중요해져

그러나 지역 편재성과 날씨 및 기후에 따른 간헐성·변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재생에너지가 중요해지면서 전력 시장도 패러다임 전환을 맞게 됐다. 우선 전기의 흐름이 한 방향이 아닌 ‘지역 내 발전↔판매’와 ‘발전↔배전↔판매’, ‘판매→배전→장거리 송전→지역 외 판매’ 등으로 재편되며 전력 시스템의 유연성이 보다 중요해졌다.

또한 간헐성·변동성을 가진 재생에너지를 더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 ESS와 양수발전, 비상용 LNG 발전 등의 계통안정화 설비가 필요해졌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이런 계통안정화에는 기존 전력 시스템보다 약 4.9배의 설비가 더 필요하다.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가 저렴해도 최종 판매 가격이 비싸지는 중요한 이유다.

이와 함께 2007년 밀양 송전탑 사태를 계기로‘ 지산지소(地産地消)’가 중요해졌다. 전기를 생산하는 곳에서 사용해 장거리 육상 송전의 설비 부담과 민원 부담을 줄이자는 개념이다. 이는 재생에너지의 지역 편재성을 극복하는 개념과도 맞아떨어졌다. 이에 정부는 분산에너지법을 발의해 통과시켰고 2024년 6월부터 시행 중이다. 이 법에 따라 분산에너지특구 3곳을 지정해 특구 내에서는 한전을 거치지 않고 전력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PPA)가 가능해졌다.

분산법 외에도 지난 2월 국회는 발전 자원의 안정적 공급과 송전을 위해 해상풍력특별법과 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 고준위 방폐장 특별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또한 정부는 두 번에 걸친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 시범사업을 마쳤고, 관련 법률은 2011년에 제정됐다. 스마트그리드는 단순한 전력망이 아니라, ‘발전-송전-배전-소비자’로 이르는 전력 흐름에 ICT 기술,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데이터 분석 기술 등을 융합해 실시간 모니터링과 최적 AI 제어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전기 가격의 예측 가능성 높여야

이처럼 에너지고속도로가 질주할 수 있는 관련 법률은 거의 준비됐다. 남은 두 가지 과제는 ‘전력 시장 개방’과 ‘전기요금 규제 철폐’다. 사업장이 재생에너지를 직접 구매(PPA)하려고 해도 망을 독점한 한전이 송·배전료로 높은 비용을 매겨 저렴한 재생에너지 발전 가격의 장점이 사라지게 돼 민간의 재생에너지 수요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한전이 독점하고 있는 전력 송전·배전·판매 시장을 개방해 에너지고속도로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투자가 유입되도록 해야 한다.

산업의 대동맥과도 같은 전력 정책에 자꾸만 복지·재분배 정책이 개입하면서 산업 전체에 커다란 비효율성이 야기되고 있다. 인공지능(AI)이 본격화하며 전력 수요가 늘고 전기차 등 교통수단의 전기화와 함께 재생에너지의 중요성이 부각될 미래에 전력 요금의 예측 불가능성은 산업계에 크나큰 부담이다. 에너지 정책과 복지 정책을 명확하게 분리해 전기요금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맞춰 정해지도록 하고, 도움이 필요한 에너지 취약계층에는 복지 예산을 활용해야 한다.

더욱이 에너지고속도로 같은 대규모 설비 투자에 민간 자본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결국 더 예측 가능한 전기 가격이 담보돼야 한다. 이러한 시장 개혁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새로운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에너지고속도로의 성공을 담보하기 위한 신설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일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RE100 산단’은 에너지고속도로와 일견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전자가 에너지고속도로를 통해 지방의 풍부한 재생에너지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방에서 재생에너지 소비처를 늘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력 수요가 지속해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에는 대규모 송전 시설과 지산지소가 능동적으로 또 유연하게 함께 확충할 필요는 있다.

산단 조성으로 RE100 달성 어려워

현재 ‘RE100 산단’ 관련 법률은 더불어민주당의 김원이 의원안을 비롯한 5건이 발의된 상태다. 민주연구원의 배지영 연구위원은 ‘RE100 산단’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RE100이 글로벌 조달 기준이자 공급망 경쟁력의 핵심 요건임에도 현행 전력시장 구조로는 국내 RE100 기업 수요 충족이 어렵다고 밝혔다. RE100 달성이 어려운 상황은 맞지만, 그 해결책이 ‘RE100 산단’은 아니다.

국내에서 RE100 달성이 어려운 이유를 지산지소 산업 단지의 부재 탓으로 보기는 어렵다. 국내 재생에너지 자체가 부족한 데다 가격도 비싸기 때문이다. 기후솔루션에 따르면 그 핵심 요인은 한전의 계통 부족 문제로 재생에너지 발전원의 계통망 접속 확충이 수년간 지연돼 한전의 송·배전료가 기존 전력원보다 턱없이 비싸진 탓이다.

김원이 의원 안에 따르면 ‘RE100 산단’ 법안의 문제점은 기존 산단 입주 기업의 RE100 달성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신도시 개념의 ‘RE100 전용 산단’을 새로 만들고, 특정 사업자를 ‘전용 재생에너지 공급자’로 선정하는 데 있다. ‘RE100 산단’ 입주 기업은 여러 경쟁 기업 중 자신에게 유리한 재생에너지 사업자와 계약하는 게 아닌, 사실상 관(官)에서 정해준 공급자로부터 정해진 가격에 전기를 구매하게 된다. 공급자 독점이 발생할 수 있고 분산에너지법상의 직접구매 촉진 방향과도 역행하는 방식이다.

기업이 RE100을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재생에너지 직접 개발, PPA 및 재생에너지 인증서(REC) 구매가 있다. 현재 RE100 수요 기업은 PPA를 kWh당 산업용 전기요금(185원)보다 싼 180원 수준에서 조달하고 있다. 그런데 현시점에서 국내 재생에너지 균등화 발전단가(LCOE)는 태양광 130원, 육상풍력 170원이고, ‘RE100 산단’의 주력 전원이 될 해상 풍력은 330원 수준이다. 전우영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에 따르면 앞으로 발전 단가는 하락하겠지만 재생에너지 증가에 따른 계통안정화 비용이 발전 단가 수준으로 높아지게 된다.

‘RE100 산단’, 파격 인센티브의 한계

이러한 부담에 더해 재생에너지 요금 상의 인센티브를 기대하고 입주할 ‘RE100 산단’ 기업들이 해상풍력 전기를 써야 한다면 오히려 더 비싼 전기요금 영수증을 받아들 가능성도 있다. 정부 재정에서 이를 부담하는 것 역시 합리적인 방향인지 의구심이 든다.

문제는 이런 가격 차이를 보전할 재원이다. 정부 재정(세금)에서 부담하면 전 국민의 부담이 되고, 전기요금에서 부담할 경우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 국민이나 소비자는 특정 지역의 ‘RE100 산단’을 위한 부담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관련 인허가를 이미 마치고 부지 조성에 들어간 용인반도체국가산단을 타지역으로 옮겨 ‘RE100 산단’으로 지정할 정도로 ‘RE100 산단’이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업 입장에서 더 나은 측면이 없는데 계획 변경에 따른 손실을 감내하라는 것도 시장 원리와 동떨어진 방식이다.

산업 경쟁력 확보에 RE100이 정말 중대한 문제라면 ‘RE100 산단’이라는 비효율적인 미봉책보다는 전력시장 개방과 전기요금 정상화라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결국 에너지고속도로라는 정책 성공을 위해서는 새롭게 ‘RE100 산단’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전력 거버넌스의 재구축이 순리다.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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