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챗GPT를 사용해보면 두 번 놀란다. 일단 인공지능(AI) 모델이 뛰어나서 놀란다. 문명사의 대전환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지 않아도 이제 ‘천재가 일자리를 없애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느낀다. 테크 엘리트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시대, 대다수 일반인은 잉여 노동력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든다.
더 놀라는 대목은 챗GPT의 아버지 격인 샘 올트먼이 갖고 있는 발상의 엄청난 스케일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소득·소비의 끊임없는 순환이 필수다. 노동력을 제공한 인간은 그 대가로 임금이나 사업 소득을 얻어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해야 돌아가는 게 자본주의다.
그런데 AI가 인간 노동을 대체하면 순환 고리가 끊긴다. 많은 사람이 생산에 참여할 기회를 잃고 그 결과 소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올트먼은 일찌감치 AI가 창출하는 막대한 부를 어떻게 나눠 구성원이 사회 시스템 안에 참여할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해왔다. 그래서 나온 게 ‘기본소득’ 개념이다. AI 기술이 창출할 막대한 부와 토지 같은 대체 불가능한 자산에 세금을 물림으로써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에서는 AI 도입으로 직원을 자르는 기업에 세금을 물리는 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챗GPT를 쓰면 쓸수록 AI가 인간이 만든 사회 전반의 시스템 자체를 새롭게 혁신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런 AI 문명을 디자인하고 있는 올트먼이 이달 초 한국에 왔다. 왜 왔을까. 한국이 필요해서다. 더 정확히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같은 뛰어난 반도체 기업에 구애하기 위해 왔다.
올트먼은 미국에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5000억 달러 규모의 초대형 프로젝트인 스타게이트를 이끌고 있다. 오픈AI는 물주 격인 소프트뱅크, 데이터센터를 만드는 오라클과 함께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이 없으면 스타게이트는 모래성과 같다. AI 인프라의 핵심은 그래픽처리장치(GPU) 가속기와 고대역폭메모리(HBM)다.
이제는 AI 인프라 구축에 들어가는 비용을 낮추기 위해 HBM뿐 아니라 그래픽D램(GDDR), 저전력D램(LPDDR) 등도 적극 활용되는 추세다. 더구나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도 한다. AI 칩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AI 시대에는 컴퓨팅의 중심이 프로세서에서 메모리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은 이미 스타게이트에서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 한미 간에는 관세 협상이 뜨거운 감자다. 도널드 트럼트 미국 대통령이 3500억 달러의 ‘선불’를 압박하면서 어려움을 겪는 상태다. 이재명 정부는 그간 한미 동맹의 현실적 필요성을 적극 어필하기 위해 미국의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활용해왔다.
그런데 차세대 문명을 디자인하고 있는 올트먼을 한미 간 ‘실리적’ 동맹에 대입해보면 추가 협력의 스펙트럼은 더 다채로워진다. 여기에는 단순히 반도체만 목록에 있는 게 아니다.
올트먼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딱 2개라고 한다. 하나는 AI를 더 잘 구현하기 위한 연료 동력으로서 에너지, 나머지 하나는 AI의 궁극적 목표인 인간의 행복과 건강을 위한 생명공학(바이오)이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우리가 강한 원자력발전, 소형모듈원전(SMR) 등과 맥이 닿아 있고 생명공학은 우리의 기형적인 의·약대 선호가 나중에 큰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 약점과 강점이 수시로 바뀌는 세상의 불예측성, 명과 암이 얽혀 있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인생을 떠올리면 우리가 AI 확산과 그 이후 산업 지형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올트먼의 돌파력도 유심히 봐야 한다. 올트먼은 트럼프의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을 지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스타게이트를 잡기 위해 텍사스 등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에 데이터센터를 집중 배치하는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 3500억 달러를 투자해도 미국 현지 정치색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트럼프가 혹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