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운, 시인/수필가)

“천주교를 믿겠느냐? 안 믿겠다면 살려주겠다!”
“난 죽어도 좋다! 천주교를 믿는다!” 그 말을 듣자 이재수는 이규석의 목을 쳤다. 그러자 그의 아들들이 달려들어 말렸으나 그는 큰 아들 이기문과 셋째 아들 기만, 넷째 아들 기생도 차례로 목을 쳐서 순교 시켰다. 1901년 신축교난이 일어나자 당시 먼 친척이며 대정현의 관노비였으며, 교난의 선봉장인 이재수가 1901년 4월 15일에 행한 일 중의 하나다. 이 사건은 신축교난(辛丑敎難), 이재수의 난 등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최근 교회는 신축교안(辛丑敎案)으로 통일했다. 교회와 민중 간의 갈등, 교회의 복음 전파 등 복합적인 배경을 고려해 ‘신축교안’이라 명명함이 타당하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제주 지역 천주교는 1858년(철종 9) 세례명 펠렉스 베드로라는 제주도민이 표류하여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귀향한 뒤, 도민 20여 명과 가족 40여 명을 개종시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선교가 이루어진 것은 1898년 대정에 사는 양 베드로라는 사람이 육지에 있을 때 세례를 받고 돌아와 고향에 선교의 터전을 마련하면서부터였다.
신축교안 당시 봉기한 민군 상무사(商務社)가 외친 것은 세폐(稅弊)와 교폐(敎弊)의 시정이었다. 주 원인은 광무(光武) 4년(1900년) 한성에서 제주로 파견된 봉세관 강봉헌의 혹심한 작폐와 그와 관련한 여러 가지 세금의 과다하고 가혹한 징수에 있었고, 다른 요인은 1886년 조불수호조약 이후 치외법권적 지위를 가진 선교사와 그들의 힘을 등에 업은 천주교 신자들이 제주도의 토착 문화를 배격하는 선교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신축교안은 1901년 5월 5일에 열린 대정군민들의 민회가 발단이 되었다. 부패한 오리(汚吏)와 불량한 교도들의 불법 행위에 대항할 집단으로써 제주 대정군(大靜郡)내 유지들이 모여 상무사를 조직하게 되었다. 봉세관의 조세 수탈에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었던 그들은 세폐(稅弊)의 시정을 국가에 요구하고자 동과 서, 두 무리로 나누어 제주 목사(牧使)가 근무하는 제주성으로 진군했다. 이를 지켜본 천주교인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해치기 위해 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한림민회소를 습격하고 대정성에 진입하는 등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를 계기로 국가의 수탈에 대한 불만은 천주교에 대한 불만으로 전환되었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민군이 주성에 입성한 5월 28일과 29일 양일간에만 수백명의 천주교도들과 도민들이 피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7월에 작성된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을 보면, 물고자(物故者, 사망자) 수는 총 317명으로서 천주교도가 309명, 평민이 8명, 성별로는 남자 305명, 여자 12명이며, 3개 군의 물고자는 현황으로 볼 때 제주군(36개 리) 93명, 대정군(26개 리) 81명, 정의군(8개 리) 142명이다.
지난 5월 24일 제주 중앙주교좌성당에서는 신축교안(1901) 발생 124주년을 맞아 교구장 문창우 비오 주교 집전으로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위한 위령미사’가 봉헌되었다. 교구 내 본당들에서도 함께 봉헌된 미사는 관덕정 일원에서 희생된 300여 명 신자만이 아니라 교안으로 희생된 모든 영령을 위한 미사이다.
서두에 언급한 신축교안 교민 희생자 이규석 삼부자와 관련하여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1938~2019) 연구위원이 고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교한 이규석은 고부 이씨 12대손으로 1845년 이수형의 아들로 제주도 대정현에서 태어났다. 큰 부자였던 이규석은 물려받은 재산을 자선사업을 위해서 희사했다. 그의 집안이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899년 파리외방전교회 빼이네 배 신부와 김원영 아우구스띠노 신부가 제주도에서 전교할 때부터 열심한 신자들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즉 당시 대정현의 천주교회당으로 중문 색달리에 공소를 차리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현재 이 순교자의 묘소는 모슬포읍에서 동남쪽 7백 미터 지점에 있는 동글 동산 옆의 밭뚝에 있고, 묘비도 세워져 있다.
신축교안에 의해 희생된 300여명의 순교자 중에는 시대에 편승해 개인의 사익을 추구하다 희생된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신앙과 신념에 의해 목숨을 기꺼이 내던졌던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 중에서 신앙의 모범을 보인 분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앞서 순교한 이규석의 본명(세례명)은 아직도 미상이다. 천주교인들에게는 후손으로서의 죄송함이 너무도 크다. 순교자 인명록 작성, 개인 열전 등을 발굴 펴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에 어떤 분이 제안하셨듯이 복자품에 올릴 수 있는 순교자의 발굴과 제안을 검토해 보는 것은 어떨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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