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2025-12-11

지난해 12월3일 이후, 나의 민주주의와 세간의 민주주의에는 확실히 균열이 생겼다. 처음에는 잊어도 좋을 작은 불쾌감이었다. 그날 밤은 긴박했고 우리는 큰 뜻에서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의 민주주의 적들에 대한 단죄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 1년 전의 일을 계속 곱씹게 된다. 그날의 적들이 다시 풀려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일을 계기로 집권한 이들의 민주주의가 나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1년 전 그날은 세계 장애인의날이었다. 비상계엄 선포 몇시간 전 장애인들은 국회에서 자신들의 시민권이 유예된 것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러고는 마치 그날 밤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국회 주변에서 노숙을 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국회로 모여 달라’는 야당 대표의 호소 이전에 국회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다. 이날의 승리가 계엄군보다 국회에 먼저 도착한 시민들 덕분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장애인들은 계엄군이나 시민들이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도착해 있던 사람들이다.

그날 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하나’였다

1년 후, 장애인 차별은 여전하고

나의 민주주의는 ‘계엄’아래 있다

민주화 훈장을 달라는 게 아니다. 이 사실을 환기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고 시민권 유예가 선포된 시점에 왜 이들이 거기 있었을까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들은 내일 일을 알고 오늘 싸움을 시작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날은 이들이 3년 동안 싸워온 날들의 하루, 조금 특별함을 더하자면, 꼭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장애인들의 권리 보장을 위한 입법과 예산을 요구하며 이들이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시작한 게 2021년 12월3일이다. 1년이 지나 2022년 12월3일이 되었고, 또 1년이 지나 2023년 12월3일이 되었으며, 다시 1년이 지나 2024년 12월3일이 되었을 뿐이다.

이날의 구호는 무척이나 고색창연했다.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 시민항쟁으로 민주화된 지가 언제인데 시민권에 대한 요구라니. 그런데 40여년 전에나 있었던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장애인들과 비장애인 시민들의 민주주의 시간이 일치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날 밤은 모두가 ‘계엄철폐’ ‘독재타도’라는 옛 구호를 외치며 민주주의의 적들과 함께 싸웠다.

그런데 다음날 우리가 염원하는 민주주의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 찾아왔다. 국회에서 노숙했던 장애인들은 오전에 국회의사당역 지하에서 ‘반헌법 장애인 권리 약탈자 윤석열 즉각 탄핵 결의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리는 ‘윤석열 대통령 사퇴 촉구 탄핵 추진 비상시국대회’에 합류했다. 이때 장애인 활동가들은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라는 대형 팻말을 들고 있었다. 시국대회에 참석한 일부 시민들이 팻말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지금은 모두가 윤석열 탄핵만을 이야기할 때라고 했다.

장애인들에게 민주주의는 ‘장애인도 함께하는 민주주의’여야 했다. 그렇지 않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날의 시국대회에서 민주주의는 장애인이 함께하는 것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무언가처럼 보였다.

내가 자꾸 곱씹어 보는 장면은 그다음에 나왔다. 시국대회가 끝난 뒤 이어진 민주당의 집회. 한쪽 구석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가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향해 윤석열 탄핵만으로는 성취되지 않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장애인의 시민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외치고 있었다. 그때 이재명 대표가 말했다. “박경석씨가 뭐 할 말 많다고 계속 저한테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 내가 마이크 드릴 테니까 마이크로 할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 조용히 하세요.”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장애인 차별 철폐운동을 열심히 하시는 분인데 오죽하면 이러고 계시겠습니까? 발언할 기회를 드리고 그다음에는 좀 조용한 환경에서 이어가겠습니다.”

이날의 영상을 본 내 머리는 ‘오죽하면 이러고 계시겠습니까?’에 희망을 걸어보자고 하는데, 마음에는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 조용히 하세요’가 얼룩져버렸다. 그날로부터 극적인 한 해가 흘렀다. 12월4일의 시국대회에서 마이크를 허락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고 그의 당은 압도적 의석을 가진 집권당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주 이들이 통과시킨 예산은 2021년처럼, 2022년처럼, 2023년처럼, 2024년처럼 장애인의 시민권을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내 안의 민주주의자는 입을 틀어막았던 지난 정권만큼이나 말을 하라며 마이크를 건네준 이 정권에도 절망하고 있다. 귀를 닫아버렸다면 입을 열어준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신의 민주주의는 회복되었지만 나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비상계엄 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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