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하고 아름다운 ‘이미래 월드’…테이트 모던 터빈홀 첫 한국 미술가

2024-10-09

1년에 한 명만 이곳의 주인공이 된다. 층고 35m, 면적 3300㎡(약 1000평)를 6개월 가까이 채워야 한다. 런던 테이트 모던 입구의 터빈홀. 버려진 화력발전소에 2000년 들어선 이 미술관을 ‘예술 발전소’로 빠르게 자리 잡게 한 상징공간이다. 여기 이미래(36)가 한국 미술가로 처음 초청됐다. 역대 최연소다.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가 8일 개막, 내년 3월 16일까지 이어진다.

지름 7m 터빈이 공중에 매달린 채 서서히 돌아가다가 철컹, 멈춘다. 터빈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반대 방향으로 다시 돌기 시작한다. 괴수의 내장 같은 형태가 터빈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빛바랜 분홍 염료가 끈적하게 흘러내려 바닥으로 똑똑 떨어진다. 54개의 쇠사슬에는 허물처럼 보이는 천조각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작가는 이걸 ‘가죽(skins)’이라 부른다.

테이트 모던에 ‘이미래 월드’가 열렸다. 물 떨어지는 소리와 거친 기계음, 너덜너덜한 천 조각과 단단한 기계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시청각적 충격을 준다. 1891년부터 100년 가까이 런던에 전기를 공급해 온 화력발전소. 이미래는 테이트 모던에 깃든 영국 산업의 역사에 주목, 핵심 전시공간이 된 터빈홀을 예술 공장으로 다시 가동했다. 발전소 철거 후에도 별다른 용도 없이 남아 있던 크레인도 처음으로 다시 쓰였다. 여기 터빈을 매달아 아름다움과 기괴함이 공존하는 생산 현장으로 재구성했다.

너덜너덜하게 늘어진 천 조각들은 산업시대 유럽 광부들의 비좁은 탈의실에서 영감을 얻었다. 갱도에 들어가기 전 옷과 소지품을 바구니에 담아 도르래로 천장에 매달아 보관했던 이들이다. 산업 사회 주역들의 흔적은 없지만, 거죽만이 남아 이들의 열망과 좌절, 상처를 증언한다. 작품은 거대한 내장지관처럼 작동한다. 전시 기간 동안 터빈이 돌며 액체 염료를 흘려보내고, 그 아래서 염색이 다 된 천은 건조를 거쳐 공중에 매달린다. 이렇게 추가되는 직물 조각은 내년 3월 전시 폐막 무렵에는 150개까지 늘어난다.

미술관에서 만난 이미래는 "터빈홀의 옛 이미지를 보고 동물의 몸과 같다고 느꼈다. 여기를 어떻게든 다시 활성화하고 싶었다"며 "중심이 되는 터빈을 심장처럼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기념비적 장소이기에, 이곳을 기념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기념물을 보며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이나 경외의 저변에는 무수한 노동에도 익명으로 사라지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 있다"고 덧붙였다.

‘열린 상처’라는 제목에 대해서는 "산업주의는 일종의 흉터다. 예술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예술가들은 계속해서 좌절한다. 그 좌절ㆍ상처와 계속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의 조각에 대해서는 아름답다기보다는 기괴하고 역겹다는 형용사가 뒤따른다. 그는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미적 경험이 있지만 내게 아름다움은 가슴 아픔이다. 심장이 움직이는 것을 감동이라고 하듯, 열린 상처는 역경이나 비극을 함께 겪어내는 것이며, 아름다움은 거기서 나온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미래는 서울대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괴물의 장기에서 체액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설치를 선보인 데 이어 부산비엔날레에서는 버려진 조선소를 비계와 가림막 원단으로 채운 ‘구멍이 많은 풍경: 영도해의 피부’로 대규모 설치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그리고 지난해 뉴욕 뉴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터빈홀 프로젝트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대형 거미를 시작으로,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인공 태양, 카르스텐휠러의 초대형 미끄럼틀 등 작가들의 대표작을 남겼다. 중국의 아이웨이웨이는 도자기로 해바라기 씨 1억개를 구워 전시장에 깔았고, 칠레 출신 도리스 살세도는 167m 길이로 바닥에 균열을 내 억압과 차별에 경종을 울렸다. 유니레버에 이어 2014년부터 현대자동차가 후원하고 있다. ‘현대미술 차력쇼’가 펼쳐지는 이곳에 역대 최연소로 초대된 이미래는 앞서 전시한 이들의 이름과 작업에 짓눌리진 않았을까. 그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팬이라 좋다"며 "사람들은 내가 무서워하길 바라는 것 같은데, 사실 난 무섭지 않고 신났다"며 웃었다.

카린 힌즈보 테이트 모던 관장은 "이미래는 올해 전시에 완벽한 선택"이라며 "터빈홀은 매년 수백만의 관람객이 들어서며 만나는 첫 공간인 만큼 경이로운 작품이 관객을 맞아주길 바라는데, 그게 바로 이미래가 해낸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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