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제조업, “초일류만 생존” 기본 다시 다져야

2025-03-19

미 관세폭탄과 중 저가공세 돌파하려면

미국의 올해 1월 무역적자는 1314억 달러로 월간 기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트럼프의 관세폭탄이 본격화하기 전 교역 상대국들이 이른바 ‘밀어내기 대미 수출’을 했기 때문인데, 미국의 10대 수입국 중 한국만 수출액이 줄었다. 관세 폭탄에다 미국 경기가 하강 조짐을 보여 한국의 대미 수출 전망은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한국 제조업은 중국의 과잉 생산, 저가 공세에도 맞서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중국은 그동안의 손실을 만회라도 하듯 미친 듯이 제조업 생산을 독려해왔다. 하지만 소비는 살아나지 않고 미국의 견제로 수출도 둔화했다. 그 결과 중국의 산업재고는 지난해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수출단가도 계속 낮춰 ‘땡처리’에 가까울 정도로 덤핑 물량을 전 세계 시장에 쏟아내고 있다.

LG ‘스마트 팩토리’로 월풀 압도

기아, 조지아에 전기차 공장 추가

세계 현지공장 운영 경험이 자산

불량률 낮춰 리콜 위험 대비 필요

중국 제조업은 낮은 가격에다 일부 산업에선 성능까지 한국을 앞서가고 있다. 세계 최대 전기차 기업인 중국 BYD는 최근 5분 충전에 400㎞ 주행이 가능한 새 모델을 공개했다. 홍콩증시에 상장된 BYD 주가는 급등해 시가총액이 1620억 달러에 이른다. 이는 미국의 GM과 포드, 독일 폭스바겐의 시총을 합친 것보다 큰 규모다.

중국 제조업은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배터리·조선·철강 등 주요 제조업 수출 점유율에서 이미 한국을 모두 제친 상태다. 한국 제조업은 지금 안팎으로 위기다. 그러나 미·중 갈등의 틈새를 파고들고 미국과 중국의 현지공장을 잘 활용한다면 한국기업에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중국은 지난 11일 폐막한 양회에서 관세장벽으로 줄어든 수출을 내수에서 만회하겠다는 소비 부양 정책을 내놓았다. 낡은 물건을 새 제품으로 교체할 때 정부가 판매가의 15%를 보조해주는 이구환신(以舊換新) 정책 등 무려 30개의 정책을 시행한다.

중국 내수 부양, 한국 기업엔 ‘글쎄’

중국 현지 공장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중국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 공장을 운영하는 삼성차이나반도체는 지난해 매출 11조1802억원, 영업이익 1조1954억원을 기록했다. 전년보다 매출은 28.5%, 영업이익은 32.7% 신장한 수치다. SK하이닉스(우시)반도체세일즈도 지난해 매출 13조104억원, 순이익 1432억원을 올렸다. 전년보다 각각 64.3%, 65.4% 늘어났다.

중국은 지난해 56조3276억원에 이르는 AI 시장 규모를 2028년엔 163조758억원으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미국의 규제로 수입이 어려운 첨단 AI 반도체 대신 레거시(범용) 반도체의 생산과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내수 부양이 반도체를 제외한 한국 기업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최근 ‘한한령’을 푸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중국 소비자들이 예전처럼 한국 제품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2~2023년 중국의 국가별 소비재 수입순위를 보면 한국은 13위로 태국(6위), 베트남(10위)보다 뒤처진다. 오히려 중국은 알리, 테무 등 강력한 유통플랫폼을 통해 한국 소비재시장 장악을 노리고 있다.

미국시장 장악한 LG전자의 비결

“미국 기업 월풀이 한국 세탁기 덤핑 때문에 공장을 닫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50%, 75%, 심지어 100% 관세를 부과했고 이제 그들은 번창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7일 공화당 하원의원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말대로 월풀 등 미국 기업이 번창하고 있을까. 실상은 정반대다. 트럼프는 집권 초기인 2017년 월풀 등 미국 기업을 돕기 위해 한국산 세탁기에 50%의 관세를 때렸다. 이에 대응해 2018년 LG전자는 테네시주, 삼성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세탁기 등을 생산하는 현지공장을 설립했다.

트럼프가 재집권한 지금 LG전자는 세탁기 등 생활가전 시장에서 월풀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 LG전자는 지난 2021년부터 매출액에서 월풀을 앞서더니 지난해엔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격차를 벌렸다. LG전자의 성공 요인은 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로봇 등 첨단 기술을 총동원한 스마트 팩토리를 건설해 세계 최고수준 효율과 품질 경쟁력을 갖췄다는 점이다. 이 공장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세탁통·건조통과 인버터, 모터 등 무거운 부품의 운반과 조립, 용접 등 위험하고 까다로운 작업을 로봇이 수행한다. 데이터 딥러닝 기술을 적용해 제품의 불량 가능성이나 생산라인의 설비 고장 등을 사전에 감지한다.

한국산 세탁기는 미국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월풀 등 미국산 세탁기는 디자인이 투박하고 소음이 심해 욕실이나 창고 등에 두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세탁기와 건조기를 결합한 한국산 ‘워시타워’가 나오면서 주방에 빌트인으로 설치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고율 관세를 극복하고 고품질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한 한국 세탁기의 성공 사례는 미국의 관세장벽과 중국의 저가공세를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를 시사해준다.

현지 공장 활용, 품질로 돌파해야

이현순 중앙대 이사장은 ‘국산 엔진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1991년 최초의 국산 자동차 엔진 ‘알파엔진’을 개발하고 중장비·탱크·장갑차 엔진과 세계 다섯 번째로 두산중공업의 가스터빈 개발을 성공시킨 주역이다.

한국 자동차는 품질·디자인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신차 품질조사에서 포르쉐·벤츠·BMW·도요타를 제쳤다. 그러나 이현순 이사장은 “아직 부품 불량률 등 개선해야 할 여지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대·기아차와 도요타의 2차 부품업체 불량률을 조사한 결과 한국업체가 일본보다 875배나 높았다”고 말했다.

미국과 EU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장벽에다 안전·환경규제와 소비자 보호를 위한 대규모 리콜 등 비관세장벽을 쌓아놓고 있다. 만약 지난해 인천 청라에서 발생한 중국산 배터리 탑재 벤츠차 화재 사고가 미국에서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회사의 존폐를 좌우할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품질 불량으로 인한 비용은 초기엔 무시할 정도지만 양산단계에 들어가면 감당 못 할 정도로 커진다.

스웨덴의 배터리 회사 노스볼트의 파산 사례는 ‘반면교사’의 교훈으로 삼을 만하다. 2016년 설립된 노스볼트는 유럽의 희망으로 불렸다. 지난해까지 누적 수주액이 550억 달러(79조7335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연간 생산량은 생산능력의 200분의 1에 불과했다. 중국 CATL의 설비를 갖추면 그대로 가동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중국인과 스웨덴 직원 간의 소통이 전혀 안 됐고 영어로 된 설비 매뉴얼조차 없었다.

세계 최고 기술을 보유한 LG에너지솔루션도 품질 문제로 비싼 수업료를 문 적이 있다. GM의 전기차 볼트 리콜 비용으로 1조4000억원, 현대차 코나 리콜비용으로 7000억원을 물어냈다. 김명환 전 LG에너지솔루션 사장은 “대규모 리콜사태를 예방하려면 방대한 양의 제조 데이터를 보관하고 정교한 품질 추적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조직문화, 정신자세 싹 바꿔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는 중국 기업이 자국에선 잘 나가도 해외 현지공장을 운영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한국은 세계 각국에서 현지공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트럼프가 아무리 위협해도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잘 버티고 있다. 기아차 미국법인의 올해 1~2월 누적 판매량은 12만 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2% 늘어났다. 기아차는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시에 있는 기존 공장 외에 인근 브라이언카운티에 76억 달러(11조329억원) 규모의 전기차공장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최준영 기아자동차 사장은 “기아차의 ‘디자인 경영’은 외관 디자인만 바꾸는 게 아니라 조직문화 전체를 효율적으로 리모델링하는 것”이라며 “해외공장뿐 아니라 국내 공장도 혁신을 향한 탈바꿈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사내방송이 불량 세탁기 부품을 칼로 깎아 맞추는 고발 영상을 내보냈고, 95년엔 불량 휴대폰 화형식을 거행했다. 여직원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휴대폰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세계시장에서 중국과 경쟁하려면 기본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 오너부터 말단 직원까지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정신 자세부터 바꿔야 한다. 이건희 회장은 이렇게 외쳤다. “관리의 삼성을 깨고 창의의 삼성을 만들자. 그러자면 초일류 품질경영이 유일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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