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숀 베이커의 영화 ‘아노라’에 5개 부문 수상을 안겨 준 지난 3일의 제97회 아카데미의 특징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 극장주의의 복원을 지향한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둘째는 인디펜던트로의 영역 확장이고 셋째는 여전히 ‘반 트럼프주의=인도주의, 세계동포주의’라는 정치성을 표방했다는 것이다. 그건 결과적으로 2020년 ‘봉준호 효과’를 이어 가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왜 극장주의의 복원인가.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눈에 들어 왔지만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무명보다 낯선’ 감독 숀 베이커는 지난 5월 ‘아노라’로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대상)을 탈 때부터 현자같은 발언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핸드폰으로 스크롤을 하고 이메일을 체크하면서 반만 집중한 채로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를 보는 방법이 아니라는 걸 세상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극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영화를 보는 것은 훌륭한 공동 경험 중 하나입니다. 나는, 우리가 친구 혹은 낯선 사람들과 웃음, 슬픔, 분노를 공유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를 바랍니다. 나는 영화의 미래는 극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에선 결코 얻을 수 없는 공동체 경험”
이번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무대에 올랐을 때는 그 연장선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영화와 사랑에 빠졌을까요? 바로 극장입니다. 세상이 매우 분열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집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공동체적 경험입니다. 그런데 지금 영화관, 특히 독립영화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팬데믹 기간 중에 거의 1000개의 스크린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지원해야 할 때입니다. 이 추세를 되돌리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문화를 잃을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외침입니다. 영화 제작자 여러분! 계속해서 큰 스크린을 위한 영화를 만드십시오! 저도 그럴 것입니다!”
숀 베이커의 극장주의, 전통적 영화보기의 방식, 그리고 그 공동의 경험이 가지는 문화적 가치에 대해 아카데미는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당분간이나마 숀 베이커의 주장, 곧 큰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자는 슬로건을 실천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영화관의 복원, 전통적 극장주의로의 회귀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영화계, 특히 국내 영화계에 의미심장한 울림을 전하고 있다.

둘째, 독립영화에 대한 이번 아카데미의 편애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비교적 유난한, 그래서 새로운 시그널을 보여주고 있다. 숀 베이커가 대중들에게 오랜 기간 무명이었던 이유는 철저하게 작은 영화를 만들어 온 독립영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는 총제작비(순 제작비+PNA(홍보마케팅)비용)가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고, 홍보를 할 수 있는 돈이 없다는 것은 영화의 얼굴인 배우와 감독, 스태프들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숀 베이커가 영화 ‘판’에 등장한 것은 40살 넘어 ‘탠저린’(2015)을 만들고 나서였다. ‘탠저린’은 독립영화답게 단 돈 10만 달러(약 1500만원)로 찍은 작품이다. 역시 독립영화답게 ‘아메리칸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숀 베이커는 이 영화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내에는 2018년에 개봉됐다. 이번 ‘아노라’의 제작비도 600만 달러(90억원) 수준이다. 이 제작비를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블록버스터와 비교하면 얼마나 초저예산에 해당하는 금액인 지를 알 수가 있다. 지난해 ‘폭망’한 영화 ‘조커:폴리아되’의 제작비는 2억 달러(3000억원) 수준이었다. 그것도 순제작비 기준으로.
올해 아카데미가 주목하고 끝까지 작품상을 놓고 경합을 벌인 작품인 ‘브루탈리스트’는 주요 부문으로 남우주연상을 가져 가는데 그쳤지만 이 작품 역시 1000만 달러(약 150억원)짜리 영화였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작품상은 영화의 기획과 제작 분야에 배점이 높은 부문이다. 작품상은 영화의 완성도만큼이나 프로덕션을 구성하고 그것을 실현시켜 나가는 모든 제작 여건, 상황, 아우라를 총합하는 것으로, 일부 평자들의 ‘취향’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도 2100만 유로(약 320억원)가 든, 할리우드로서는 저예산영화였다. 비교적 톱스타 급 배우들이 많이 나온 ‘콘클라베’도 2000만 달러(약 300억원)짜리 영화로, ‘컴플리트 언노운’과 ‘듄 파트2’를 제외한 작품상 후보작 대부분이 저예산이었다. 미국 소니 픽처스 클래식의 브라질 영화 ‘아임 스틸 히어’도 800만 헤알(약 22억원)짜리 영화였다. ‘아임 스틸 히어’는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으며 역시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이 후보작들은 올해 아카데미가 얼마나 저예산 영화들에 주목하고 또 공을 들였는가를 보여 준다. 거꾸로 독립영화들이 할리우드 주류를 향해 현재 얼마나 공격적으로 치고 들어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국내 영화계로서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셋째, 아카데미는 트럼프 2기를 맞아 그의 여전한 고립주의에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특히 이민자들과 소수자들에 대한 그의 정책에 반대하며, 적어도 영화는 인도주의적 문제, 계급계층의 문제에 여전히 귀기울이고 있음을 웅변했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트럼프 1기 말에 아카데미를 휩쓸었다는 것과 ‘아노라’가 2기 시작과 함께 이변을 일으킨 것에는 일맥 상통하는 고리가 있다. 두 작품 모두 배급사는 니온(Neon)이고 그 책임자는 톰 퀸이다.
영화 ‘아노라’는 애니라는 여성, 우즈베키스탄 식 발음으로는 아노라라는 이름의 여자(마이키 매디슨), 그것도 성 노동자 이야기다. 즉 애니는 창녀다.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그리고 거리낌없이 자신의 몸을 소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러시아 재벌의 아들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에게 일주일간 섹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1만5000달러(약 2000만원)를 받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까지 하지만, 일주일 후 처절하게 버림받는다.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그것을 좇아가고 있는 러시아 자본주의는 절대로 애니=아노라가 추구하는 신데렐라의 꿈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짓밟고 짓이긴다. 영화의 백미로 꼽히는 마지막 이고르(유리 보리소프)와의 섹스신은 애니가 자신의 정체성, 곧 애니라는 부자가 될 수 있는 미국 여자가 아니라 아노라라는 이름의 이민자 하층계급 여자임을 인식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세상서 가장 낮은 계층에 따뜻한 시선

숀 베이커의 전작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6살짜리 꼬마 여주인공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그녀의 철없는 엄마 핼리(브리아 비나이트)는 플로리다에 있는 꿈의 궁전 디즈니 월드 건너편의 허름한 펜션에서 살아 간다. 핼리는 결국 월세와 아이 무니가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아이를 욕실에 넣어 둔 채 몸을 팔기 시작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도 성 노동자 이야기이며 베이커의 또 다른 작품 ‘탠저린’도 길거리에서 윤락 행위로 살아 가는 트랜스젠더들의 얘기이다. 숀 베이커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계층과 계급, 그것도 여성과 성소수자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럼에도 숀 베이커는 이야기를 지나치게 사회구조적 이론으로 환치시키지 않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에 다가서게 하려고 만든다. 그의 영화가 가장 낮은 곳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심지어 코믹하기까지 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이유다. ‘아노라’의 앞 부분 1시간은 섹스 영화를 방불케 할 만큼 야하지만 뒷 부분 1시간은 슬랩스틱에 가까운 코미디이고 마지막 엔딩 장면이 극히 슬픈 이유는, 숀 베이커가 날카롭고 비관적인 지성의 인물임에도 결국 희망과 낙관의 의지를 지니고 있는 작품을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는 다시 한번 미국이라는 나라와 세계가 서로에게 담을 쌓기 보다는 극장이라는 작은 공간에서부터 연대하고, 작은 돈으로 큰 의미를 만들어 가며, 낮은 곳에 임하는 인도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보여줬다. 딱 5년 전 봉준호의 ‘기생충’이 만들어 낸 항목들이다. ‘아노라’의 성취가 ‘기생충’의 그것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는 이유다. 숀 베이커는 또 다른 봉준호다. 그걸 보여 준 아카데미였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