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세기에는 끊임없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삶의 근본적인 해답을 찾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고단한 삶에서 가장 확실한 위로는 내세였다. 중세 기독교도인들은 천국에 가려면 일생 동안 저지른 큰 죄를 용서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성지순례는 가장 확실한 참회의 방법 중 하나였다.
육체적 고통을 수반할수록 정신적 위로는 더 컸다. 이런 이유로 중세인들의 최대의 버킷리스트가 예수살렘, 로마, 베네치아 성지순례였다. 예수살렘은 그들의 종교적 뿌리가 있는 곳이니까 말할 것도 없고, 로마는 베드로가 묻혀있고 베네치아도 마가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순례길은 길도 좋고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이지만 당시 그 길은 강도, 도적 등 온갖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신념과 열정으로 그 길을 떠났다.
11세기가 들어서면서 스페인 남부를 비롯해 예루살렘 일대에는 이슬람 세력이 자리를 잡게 돼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더 이상 갈 수 없게 됐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면서 덜 위험한, 뜻밖의 장소가 중세 유럽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그곳이 지금의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다.
800년경 스페인에서 야고보 성인이 유해가 발견된다. 야고보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를 당했다. 순교 후 제자들이 시신을 예루살렘에서 빈 배에 실어 보냈는데 스페인에서 해안까지 떠 내려왔고 그 근처 어디엔가 묻혀있다가 800년경 무덤이 발견됐다. 그 뒤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 ago de Compostela)가 새로운 성지 순례지로 각광받기 시작한다.
당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남쪽 이베리아반도에는 이슬람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경각심을 일깨워서 그들을 밀어내고자 하는 목적, 종교적 열정과 신념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으로 너도나도 순례길을 떠났다.
산티아고(Santiago)는 성인 야고보라는 뜻이고 콤포스텔라(Comp ostela)는 별의 들판이라는 뜻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는 야고보 성인의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 go de Compostela)에 세워진 성당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 ago de Compostela)성당이고 순례의 최종 목적지다.
프랑스 중세도시 파리, 베즐레, 르퓌, 아를이 출발지가 되고 피렌체 산맥을 넘어 푸엔테 라 레이나를 중간 기점을 머나먼 순례길을 떠났다. 순례길 열풍을 따라 11~12세기 지역과 지역, 사람과 사람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고 전 유럽에서 교회 건축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지게 된다.
인근 교회보다 더 호화스럽게 경쟁하면서 짓기 시작하고 그 교회들은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는데 그 건축 양식을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부른다. 로마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따 왔다고 해서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부르는데 로마의 대표적 건축물 콜로세움의 아치 형식을 적용해 지은 건축으로 순례길의 출발지 르퓌의 르퓌 대성당, 베즐레 성 마들렌 성당은 아치가 연속된 건축물이다. 그 중심에 아치가 공간을 형성한 돌로 된 볼트 천장이 있고 그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두꺼운 벽과 기둥이 있으며 작은 창문을 낼 수밖에 없어서 실내가 어두운 특징이 있다.
아치를 사용한 건축 형태는 기독교 공인 후 지어진 바실리카 양식의 건축물이 있으나 바실리카 양식은 지붕이 나무로 되어 있어 볼트 형태의 돌로 된 지붕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구별된다. 그 외에도 로마네스크 형식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으며 볼트로 된 중심부에 돔식 종탑이 있고 창문은 원형식 장미 모양을 하고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순례길과 호화로운 교회 건축 붐이 일면서 지어진 수많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많은 성당은 동시대에 만들어졌다. 그 길을 떠나 보자.
권오기 여행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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