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고향 타이저우가 상하이와 아주 다른 곳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상하이는 런던과 파리 같은 도시의 모습을 따라 건설된 도시이고 상당한 구역이 영국인과 프랑스인의 지배를 받는 곳이라고 어머니가 설명해주셨다. 중국에서 새로운 것은 모두 그 도시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읽으시는 신문, 잡지를 포함해서. 중국 지도자들은 상하이를 미래 중국을 위한 모델로 삼았고, 상하이의 산업은 서양을 따라잡고 있다고 하셨다. 중국 회사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려 노력하고 중국인들이 자기네 물건을 더 많이 사주기 바라지만 서양 제품과 경쟁해야 했고, 특히 상하이에 있는 일본 공장에서 나오는 값싸고 질 좋은 제품과의 경쟁이 힘들다고 하셨다.
중국과 일본 사이 전쟁이 벌어진 이제 이포에서 일어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보라고 하셨다. 일본 상품이 사업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불매운동을 외면한 중국인 상인들이 불러온 폭력사태도 설명하셨다. 폭력사태를 내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욕먹는 상인들을 흥분한 애국자들로부터 보호하러 경찰이 나서야 할 때가 종종 있다는 사실은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 중국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어머니 말씀을 그때부터 더 유의해서 듣게 되었다. 고향이라는 곳을 전보다 실감나게 느끼게 되었다. 그곳을 바라보는 내 시각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고전 문헌보다 어머니가 생생하게 그려주시는 전쟁과 파탄의 그림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부모님이 데려다 보여주시는 전쟁영화나 애국영화에 주의력을 더 기울이게 되기도 했다. 〈팔백장사〉만큼은 아니라도 또 하나 큰 충격을 준 영화가 있었다. 1940년 아니면 1941년에 악비(岳飛)가 나오는 영화가 이포에 왔다. 북중국을 침략한 금나라와 싸우기 위해 명령을 어긴 송나라 장군의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이 영화를 좋아하셔서 악비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시 “만강홍(满江红)”을 가르쳐주셨다. 이 감동적인 시의 도입부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울리고 있다. 그때 내 삶에 들어오고 있던 민족 감정에 가까운 것이 이 시에 담겨있었다. 이 시를 가사로 한 노래가 매우 인기 있었고 아직도 내 애창곡의 하나다. 그때 유행하던 이 노래를 배우기는 했는데 작곡자가 누군지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아직까지 부르는 전쟁 시절 노래 몇 개 중 하나다.
부모님은 더 자주 나를 영화관에 데려가기 시작했고 나는 한 편 한 편을 기다리게 되었다. 어떤 중국 영화들을 어머니가 싫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관중을 너무 슬프게 만드는 최루탄 영화가 많은데, 그러지 않아도 삶은 슬픈 것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한 것이다. 나는 유행가가 나오는 영화들이 특별히 좋았다. 저우쉬안(周璇)과 바이광(白光)이 부르는 노래들이 좋아서 우 선생 댁 아이들과 함께 부르곤 했다. 저우쉬안의 〈길거리 천사(馬路天使)〉는 여러 해 동안 잊을 수 없는 영화였다.
〈팔백장사〉를 본 것은 유럽전쟁이 임박한 때였다. 영국,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유럽전쟁에 묶여 있는 동안 일본이 그 식민지들을 넘볼 유혹을 느낄 위험을 선생님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주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걱정할 만한 이유가 생겨나고는 있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중일전쟁에 관한 이야기도 교실에서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말라야로 번져 올 위험에 대한 걱정이었다.
말라야 정부는 정상적 상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영국인 관리들이 중국 지원 운동에 더 협조적이 되기는 했고 어머니의 참여 활동이 많아진 것도 기억난다. 그러나 아버지는 정치 논쟁에 끼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었다. 여러 중국인 집단의 정치화된 학교 행사들을 감시할 책임이 그분에게 있었다. 말씀을 적게 하면서 드러나게 행동하지 않으시는 가운데 학교 이사회나 교장들이 학교를 정치적 무대로 만드는 것을 억제하려고 애쓰셨다. 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좋은 교육을 보장하는 것을 당신 책임으로 생각하고 학생들이 너무 흐트러지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많은 모금행사에 참석하고 조언을 청하는 누구와도 대화를 하셔도 중국 정치에 관해 공적 발언을 하시는 일은 없었다.
나이가 더 들며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분이 책임감이 강하고 자제력이 큰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엄격한 유교 교육을 받은 그분은 독선적인 정당이나 집단들이 합법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교육 관리로서 그런 일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불만을 가진 지역의 집단들 사이에 늘 벌어지는 갈등에 말려들 때 얼마나 괴로운지,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계속 내게 중국어를 가르쳤고 쉬워 보이는 산문이나 시를 내가 외우지 못할 때는 화를 내셨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어 공부를 북돋워 주고 영국 영화를 보여주기까지 하셨다. 아버지는 역사 영화를 좋아하셨고 어머니도 좋아하셨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나 〈엘리자베스 여왕과 에섹스 공작의 사생활〉 같은 영화에 어머니가 특히 감동을 느끼시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삶에 관해 얼마나 잘 아시는지, 역사 속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는지 들으면서 나는 놀랐었다.
한나라 개국에서 역할이 컸던 여후(呂后)나 늙으신 아버지 대신 남장을 하고 병사가 된 화목란(花木蘭)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목란종군(木蘭從軍)〉 영화가 이포에 왔을 때 어머니는 너무 좋아서 나를 두 번이나 데리고 가셨다. 내게는 화목란 역을 맡은 배우 천윈상(陳雲裳)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화목란 이름만 나오면 그 얼굴이 떠올랐다. 배우를 그만두고 상하이의 의사와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50년 후 홍콩에서 만났을 때 화목란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 여전한 것을 보고 기쁘고도 놀라웠다.
어머니가 페미니스트는 아니라도 전통 중국에서 여성의 지위에 관해서는 생각이 많으셨다. 화목란 이야기가 여성의 활동력을 제한하던 전족(纏足)이라는 끔찍한 관습 이야기로 이어졌다. 화목란이 훌륭한 군인이 된 것도, 당나라 황후 무칙천(武則天)이 큰 권력을 쥔 것도 발이 묶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중국 여성의 발이 묶이게 되었고 많은 집안에서 여자아이의 발을 작게 만들라는 압력이 갈수록 심해졌다. 17세기 만주족의 중국 정복 이야기에 이를 때면 이 풍속에 대한 어머니의 비판이 특히 거세졌다. 야만족인 만주족의 여성 대접이 나았다는 것이다. 만주족은 중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나 여자들 발을 괴롭히는 짓은 따라 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열 살쯤 때 절름발이가 될 위험을 아슬아슬하게 모면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발 묶기를 감독하고 왜 필요한 일인지 설명하면서 외할머니도 우셨다고 한다. 묶은 발을 풀어 발이 살아나게 된 순간을 어머니는 실감 나게 그려주셨다. 여자에게 잔인하던 왕조체제를 무너트린 1911년 혁명을 이 일 때문에 영원히 고마워한다고 말씀하셨다. 발을 보여주면서 완전한 크기로 자라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셨다. 여성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 근대 서양사상을 존경하는 까닭도, 중국의 부강을 되찾으려 애쓰는 근대주의자들을 지지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하셨다. 그 후로 나는 인간사회의 발전과 여성의 지위를 떼어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근대성보다 문학적 기술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하셨다. 중국 문명을 위대하게 만든 것이 그런 기술이며, 나아가 서양 문명을 진보적이고 매력적인 것으로 만든 언어와 사상을 배우기 위해서도 비슷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 그 까닭으로 당신의 책과 잡지들을 나도 읽도록 늘 권하셨고, 유명한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오면 보여주셨다.
소학교 때 나를 처음 데리고 가신 영화 하나가 〈두 도시 이야기〉였던 기억이 난다. 영화 보러 가기 전에 그 소설책을 보여주면서 언젠가 직접 읽을 수 있도록 영어 공부를 잘하라고 하셨다. 영화를 잘 감상할 수 있게 줄거리도 가르쳐주셨다. 그 영화의 인상이 하도 강렬해서 데이비드 역을 맡은 젊은 배우 프레디 바솔로뮤의 이름을 잊지 않게 되었다. 그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꼭 보여달라고 졸랐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여배우 셜리 템플보다 바솔로뮤가 더 좋다고 어머니께 말한 기억도 난다.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영화는 트라팔가해전 후 넬슨 제독의 죽음이 나오는 〈런던의 로이드〉였다. 애국사상이 어떤 것인지, 그 사상이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지 새로 가르쳐준 영화다. 넬슨은 내 마음속에 영국판 악비로 자리 잡았고, 그가 죽는 장면에서 느낀 슬픔은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1954년 런던에 처음 가 트라팔가광장의 넬슨 동상 앞에 섰을 때 그 슬픔이 나를 다시 압도하는 데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넬슨이 적과 싸우다가 죽음으로 명예를 얻은 데 반해 악비는 지키려던 나라의 임금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사실에서 더 큰 슬픔을 느꼈다.
영화들을 보면서 중국어와 영어 두 언어에 내가 초보적 수준에서라도 편안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부모님의 세계가 앤더슨학교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 나의 세계와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부모님께 배우는 중국 고전문헌의 토막토막과 학교에서 접하는 지중해세계의 우화와 신화들이 서로 겹쳐지지는 않았더라도 이포 바깥의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야를 크게 넓혀주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