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사회

2025-09-16

안성준 제주한라대학교 인공지능학과 교수/논설위원

최근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매뉴얼 사회’로 바뀌고 있는 듯 하다. 공공 기관과 민간 기업을 막론하고, 업무의 표준화와 효율성을 내세워 모든 것을 매뉴얼화 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뉴얼 만능 주의가 과연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이 매뉴얼이 우리 사회를 얽매고, 일의 본질을 잃게 하고, 혁신의 발목을 잡지는 않을까?

매뉴얼의 가장 큰 문제는 형식을 중시하다 보니 본질이 희생된다는 것이다. 행정기관 민원 창구에서 “담당 부서가 다르다”는 이유로 전화를 돌리며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일은 결코 낯선 장면이 아니다. 학교에서도 비슷하다. 학생이 단순한 상담이나 문제 해결을 원해 찾아가도, 정해진 절차와 담당 교사 규정이 우선이라며 여러 번 교무실을 오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기업 현장도 다르지 않다. 고객의 불만 제기나 서비스 요청이 들어와도,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라며 담당 부서로만 돌리는 사례가 흔하다. 이렇게 공공 기관에서부터 학교, 기업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전반은 ‘매뉴얼 사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해진 절차를 지킨다는 명분 뒤에 숨어 시민, 학생, 고객이 원하는 신속한 해결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결국 형식이 본질을 앞서는 사회적 관행을 바꾸지 않는 한, 사람들의 불편과 불신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매뉴얼이 책임 회피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사고가 발생한 경우, 가장 먼저 검토되는 것이 ‘매뉴얼을 제대로 따랐는가?’이다. 만약 매뉴얼을 준수했다면 면책되고,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책임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현장의 책임자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매뉴얼을 엄격히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매뉴얼의 준수가 책임 판단의 기준이 되면서, 결국 더 큰 재난을 예방할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다.

매뉴얼 사회의 또 다른 큰 문제점은 혁신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방법’은 곧 ‘매뉴얼에 포함되지 않은 방법’이 되어버리며, 이는 위험하고 책임지지 못할 일로 간주된다. 현장에서 더 나은 아이디어가 제안되더라도 간혹 ‘매뉴얼에 없다’는 이유로 묵살되기 일쑤다. 일본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일본 기업들은 오랫동안 철저한 매뉴얼과 품질 관리 시스템으로 명성을 얻어왔지만, 스마트폰과 전기차 시대의 도래로 인해 뒤처지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도요타와 소니가 테슬라와 애플 같은 혁신적인 회사들에 비해 경쟁력을 잃게 된 이유가 바로 기존의 매뉴얼에 얽매여 파괴적 혁신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뉴얼은 과거의 경험과 사례를 정리한 자료일 뿐 새로운 미래의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물론 매뉴얼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업무 표준화, 품질 관리, 신입사원 교육 등의 영역에서 매뉴얼은 분명 필요하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사람들의 사고를 멈추게 한다는 점이다. 매뉴얼은 출발점일 뿐, 도착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매뉴얼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매뉴얼을 참고하되 본질을 잃지 않도록 하고, 책임을 다하면서도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매뉴얼에 의존하는 사회에서 사고 하는 사회로의 전환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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