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에 핵무기가 남아 있었다면.”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설전을 보면서 떠올린 엉뚱한 상상이다. 1991년 옛소련 해체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소련이 배치해 놓은 핵미사일 176기와 핵탄두 1800여 개가 있었다. 규모로만 보면 세계 3위의 핵전력. 이 중 몇 개라도 잔존했다면 트럼프가 “당신에겐 카드가 없다”고 모멸을 줬을까.
오해하지 마시길. 우리도 자체 핵무장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제역학상 위험과 비용이 너무 크다. 우크라이나도 핵을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했겠나. 경제적·군사적·기술적 능력도 없었고, 열강들도 허용하지 않았다. 기껏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러시아·영국과의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각서’(1994년). 남아 있던 핵무기를 러시아로 반출해 폐기하고, 그 대가로 주권과 국경선을 보장받는 내용이었다. 조약도 아닌 각서는 이미 휴지 조각이 돼버렸다.
반도체는 한국의 지정학적 기술
기회-위기 교차하는 글로벌 칩워
정치권은 정쟁, 기업은 악전고투
숱한 난제 기업이 직접 해결해야
핵무장이 아니라면 한국의 ‘최종 병기’는 뭘까. 세계 5~6위라는 재래식 군사력? 물론 군사적 자강이 중요하지만, 국제분업 구조에서 한국의 존재감은 첨단 제조 능력에서 나온다.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은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선진국 중 가장 크다(2021년 기준 28%, 유엔 자료). 핵심은 역시 반도체다. ‘21세기 핵무기’라는 AI(인공지능) 개발 경쟁의 ‘린치핀’이다.
AI 개발의 주도권은 미국과 중국이 틀어쥐고 있다. 언어·인구·시장·개발능력 등을 고려할 때 그 추세는 더욱 굳어질 것이다. 이 구도에서 반도체는 한국의 몸값을 높이는 지정학적 기술(geo-technology)이다. 자오밍하오(趙明昊) 푸단대 교수는 “(21세기 들어) 기술을 중심으로 한 동맹이나 진영 구축이 강대국 경쟁의 초점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최종 병기의 날을 벼리는 작업이 온전히 기업 몫이라는 점이다. 세금이나 행정절차 등에서 정부·지자체의 지원이 없다곤 할 수 없지만, 거액의 보조금까지 퍼붓는 경쟁국에 비해서는 보잘것없다. ‘주 52시간제 예외’만 하더라도 거대 야당의 친노동 도그마에 걸려 제자리걸음이다. 당 대표는 표를 의식해 현란한 갈지자걸음만 할 뿐이다. 민주당은 주 52시간제 예외를 쏙 뺀 반도체특별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렸다. 기업은 속이 타는데 최대 330일이나 걸리게 생겼다. 차라리 슬로트랙이란 말이 어울려 보인다.
여당도 피장파장. 반도체특별법엔 주 52시간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 설치, 전력·용수 인프라 지원, 인허가 신속처리 등 기업이 목말라 하는 내용이 즐비하다. 이를 제쳐놓고 여당이 주 52시간에 매달리는 이유는 뻔하다. 거대 야당과 각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책임한 정치에 갇혀 국가의 조정능력은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반도체 전쟁 최전선에 선 기업은 고군분투하고 있다. 단적인 사례가 SK하이닉스 용인 클러스터다. 총 120조원이 투입될 이 클러스터는 계획 발표 6년 만에 부지 조성을 마무리했다. 2년 뒤 첫 공장이 준공돼 가동을 시작하면 총 8년이 걸리는 셈이다. 일본 구마모토현에 짓는 TSMC 공장이 2022년 계획 발표 2년 만에 완공돼 양산을 시작한 것과 대조된다. 회사 관계자는 “우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발버둥치지 않았다면 6년도 어림없었다”고 단언한다.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의 땅은 ‘역사적이고 인류학적’이다. 문화재, 묘지, 문중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소유주가 몇 명 안 되고, 부지 전체가 옥수수밭이나 당근밭이었던 미국, 일본과는 달리 개발이 더딜 수밖에 없다. 이런 난관을 기업이 혼자 풀어야 한다. 용인 부지 내 500여 기에 달하는 무연고 묘지의 연고자를 찾기 위해 명절 때 직원들을 풀어 성묘객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기도 했다. 토지·건물 보상을 빨리 끝내기 위해 감정가의 13~30%를 더 줬다.
진짜 난제는 인접 지자체 간의 이해 조정이다. SK하이닉스 부지는 용인에 있지만, 용수는 여주에서 공급받고 방류수는 안성으로 내보낸다. 평택 삼성전자 공장도 송전선로 문제로 안성시 원곡면 주민과 10년간 갈등을 빚었다. 법인세의 10%인 지방세는 공장 소재 지자체에만 돌아가 인근 지자체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기업 관계자가 해당 지자체 주민과 공무원을 일일이 만나 불만을 풀어야 했다. 사회공헌기금 같은 ‘변형된 이익 배분’으로 겨우 해결했다. “보상·수용의 원칙을 정비하고, 지자체 간 이익 배분의 규칙도 정해 달라.” 기업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AI 시대 개막과 트럼프 정부 출범으로 반도체 산업은 기회와 위기의 교차점에 서 있다. 세계가 사활을 걸고 ‘칩 워(chip war)’를 벌이는 지금, 반도체 산업 지원은 전쟁으로 치면 보급이라 하겠다. 전투에서 지는 건 용서할 수 있어도 보급에서 실패하는 건 용서받기 힘들다. 더 세심하고 과감하며 체계적인 보급이 없다면 전쟁의 결과는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