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회담이 파행으로 끝났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은 유럽과의 분리, 러시아와 관계 회복을 넘어 미국이 추구했던 가치 동맹을 희미하게 하고 ‘경제적 거래’만 남겼다.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강자만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가운데, 아세안은 독특한 지정학적 포지션을 확보했다. 동북아와 인도양·태평양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면서도, 주요 강대국과의 직접적인 군사적 긴장 관계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낮은 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의 아세안 FDI 급증
아세안의 지정학적 안정성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경제적 기회로 이어졌다. 미·중 무역 갈등, 코로나19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아세안이 대체 생산기지로 급부상한 것이다. 미국의 아세안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2017년 291억 달러에서 2023년 744억 달러로 급증했고, 아세안의 대미 수출도 2017년 1425억 달러에서 2022년 2910억 달러를 돌파하며 중국을 제치고 수출 대상국 1위로 올라섰다. 2024년 미국 수출에서 베트남(23.4%)과 말레이시아(23.2%), 인도네시아(19.2%), 태국(13.7%) 등 주요국 모두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아세안의 낮은 지정학적 리스크
일본·중국·EU의 협력 경쟁 치열
한국, 상생 위한 맞춤 전략 필요
아세안 지역의 수출 효자 상품은 반도체를 포함한 전기·전자 부문이다. 삼성전자와 애플의 아이폰 제조사인 폭스콘과 부품업체, 반도체 기업인 인텔과 인피니온 등 굴지의 글로벌 기업과 현지 기업이 이들 지역에 포진해 있다. 이러한 성장은 새로운 교역 구조를 동반한다. 아세안의 대미 수출 증가는 중국으로부터의 중간재 수입 증가와 함께 일어나 아세안-중국 간 무역수지 적자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역내 국가 간 교역 비중과 경제적 의존도가 재편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아세안에서 일본과 중국, 유럽연합(EU)의 전략적 협력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진 지는 오래다. 일본은 공적개발협력과 1만5000개 이상의 기업 진출을 기반으로 한 ‘GX 추진 전략’을 통해 그린 인프라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인프라와 원자재 개발에, EU는 녹색 전환, 교통과 디지털 연결성에 100억 유로를 투자하며 차별화한 협력 의제를 제시하고 있다.

반면 아세안이 한국의 3대 교역 대상이자, 가장 많은 기업이 진출한 지역임에도 한국의 경우 일관된 전략적 접근이 부재하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아세안을 전략적으로 격상시켰으나, 현 정부에서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하위 요소로 축소됐다. ‘한-아세안 연대 구상’을 발표했지만 추진력을 얻지 못했고, 120여개 이상의 협력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프레임 워크는 부재한 실정이다.
이제 더 기다릴 여유가 없다. 아세안 정책의 새로운 밑그림이 필요하다. 첫째, 약화한 관계를 복원하면서 차별화된 비전을 수립해야 한다. 일본이 그린 전환, 중국은 인프라와 테크놀로지, EU가 지속 가능성과 연결성이라는 주요 의제를 선점한 상황에서 한국만의 경쟁력을 활용한 새로운 협력 방안이 필요하다. 특히 각국의 기술과 역량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상생을 위한 기술 오케스트레이션’을 주도하며 한국의 차별화된 역할을 강조할 수 있다.
둘째, 싱크탱크를 통한 정책 협력이 필요하다. 일본의 ‘아세안·동아시아경제연구소(ERIA)’와 중국의 ‘아세안+3 거시경제조사기구(AMRO)’처럼 한국도 아세안 내 전문 싱크탱크를 설립 또는 강화해 장기적 정책 협력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은 협력 증진을 위한 국제기구로 ‘한-아세안 센터’를 설립했지만 싱크탱크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현재의 ‘한-아세안 센터’를 넘어 정책 연구와 실행을 연계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셋째, 솔루션 접근법이 필요하다. 아세안 회원국은 경제 발전 정도와 사회·문화·정치적 배경이 다르고 적정 기술도 상이하다. 진정한 맞춤형 전략은 상대국이 표면적으로 요구하는 첨단 기술이나 인기 산업을 단순히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국의 실질적 문제와 한국의 역량이 교차하는 지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상대국이 원하는 것과 실제로 필요한 것 사이에는 종종 괴리가 있으며, 상대국의 구체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한국의 이익과도 부합할 때 진정한 시너지가 발생한다.
‘팀 코리아’ 전략으로 기업 진출 도와야
넷째, 팀 코리아(Team Korea) 전략도 필요하다. 민·관 합동의 경쟁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한국 정부와 기업, 금융기관이 협력하는 통합 시스템이 필요하다. 공적개발원조(ODA) 부문 역시 미래에 시장 확대로 이어지는 지원 체계를 구축해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다섯째, 인재 육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세안 각국의 혁신 성장의 한계는 인재풀의 부족이다. 현지에서 기초 및 직업 교육 기회 제공과 함께 한국에서 최고 인재들이 석·박사 및 전문가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동남아의 유학생 중 이공계 전공자조차 한국에서 취업에 제한이 있다. 인적 교류의 확대는 협력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한국과 아세안 각국 사이의 양자 관계나 다자 관계의 고도화가 멈춰버린 사이, 중국과 일본의 침투는 훨씬 활발하게 진행됐다. 미국의 전략적 공백은 일본·중국·EU 간 경쟁을 심화하는 한편, 아세안 국가의 협상력과 중심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권력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 속에서 한국-아세안은 서로 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환경의 변화를 인식하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협력의 실효성과 지속성이 유지된다. 지금이 바로 그 새로운 길을 함께 열어갈 때다.
고영경 연세대 국제학대학원·디지털통상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