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꽃이 되는 이가 아니고 거름이 되는 이!
만물의 영장이면서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뭇 인간에게 ‘나이 듦’은 무슨 의미인가? ‘나이 듦’은 말 그대로라면 늙은이(노인)이겠지만 이제까지 사회는 나름대로 원로, 어르신, 장로, 선생 등으로 표현했다. 이들은 인생경험을 축적한 경륜으로 존중받고 심지어 존경받았다.
비슷한 의미의 장로(長老)는 원래 불교에서 쓴 용어였으나 지금은 기독교에서 더 많이 쓴다. 특히 원로(元老)는 우두머리, 지도자란 속뜻이 있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 시대에 정책결정기구로 시민의 평민회와 귀족의 원로원을 두어 ‘원로원’이 명실상부한 상원(上院)의 역할을 했다. 이때 원로란 정치권위의 상징이었다.
현재 생물학적 나이는 가파르게 고공행진하고 있다. 내가 사회 진출할 무렵인 1980년대 초반만 해도 60세 환갑나이 정도면 사회의 우두머리 대접을 받았다. 환갑이 되면 웬만한 사람은 가족잔치를 벌였고 재력가나 유명인은 동네잔치를 열었다.
생물학적인 ‘나이 듦’만으로도 존중과 축복을 받았다. 환갑을 넘기고 사망하면 호상(好喪)이라며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4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격세지감을 느낀다.
조선시대는 15살 전후에 결혼을 했고 평균 수명은 35살이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65세 이상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 세계적인 추세 가운데서도 앞서고 있다. 나는 올 10월에 만 70세가 되지만 동문회에 나가면 친한 선배들에게 ‘어이, 필경이!’라고 불리어서 그런지 '나이 듦'을 원로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영양섭취와 의학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이 전에 비해 수명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나이 듦’의 기준과 의미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대구는 지하철 무임승차 기준을 65세에서 70세로 높이고 있다. 나아가 일반적인 노인복지 시행기준을 75세로 높이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세태가 크게 달라지면서 과거의 '나이 듦'에 비해 사회적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70세인 나에게 후배들이 원로‧어르신이란 호칭을 사용하면 어색하면서 굉장히 쑥스럽다. 뭐든 귀한 것이 흔해지면 의미가 달라진다. 하루 한 끼 식사조차 어려운 시절에는 ‘흰 쌀밥과 고깃국’이 삶의 목표였지만 지금은 흰 쌀은 남아돌아가고 고깃국도 흔한 대중식사일 뿐이다.
‘나이 듦’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노인이 귀한 시절에는 ‘나이 듦’만으로도 어르신이나 원로로 지도자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지금 지하철을 타보면 무임승차 노인들이 수두룩하다. 이제 ‘나이 듦’으로만 존중 또는 존경을 하기도 그렇고, 받기도 그렇다.
‘나이 듦’을 어르신이나 원로로 존중하려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너도 나도 노인’인 세태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https://www.gunchinews.com/news/photo/202502/67700_74589_582.jpg)
1. 나이가 ‘원로(어르신)’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원로였던 함석헌 선생은 미국에서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듣고 그 날 밤새 펑펑 우셨다고 한다. 그 후 김포공항으로 귀국하자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약 40km 거리(지금 네이버 지도상의 거리)에 있는 쌍문동 전태일의 집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이소선 어머니 말에 따르면 예수처럼 긴 수염에 흰 두루마리 한 복을 입은 이가 “여기가 전태일 선생의 집이요?”하며 집으로 들어와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함석헌 선생은 1901년 생으로 이소선 어머니보다는 28살 많고 전태일 열사보다는 47살 많았다. 며느리 뻘 어머니와 손자 뻘인 전태일 열사에게 예의를 차렸다고 한다.
함석헌 선생은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의 교회에서 매년 전태일 열사 기념식을 했고 전태일 열사를 언급할 때는 ‘선생’이란 존중과 존경의 호칭을 붙였다. “70이 넘은 내가 평생 이루지 못 한 일을 젊은 전태일 선생이 해냈으므로 그는 나에게는 선생이요!”했다고 한다.
덧붙여 “전태일 열사는 나에게 선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얼마나 먹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 할 일을 다 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문익환 목사는 1918년 생으로 이소선 어머니보다 11살이 많았다. 민주화운동을 하며 이소선 어머니를 항상 어머니로 부르며 존중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한유(韓愈)는 당나라를 대표한 대 문장가였다. 다음 글을 남겼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 그 도(道) 듣기가 진실로 나보다 먼저라면 내 그를 스승으로 삼으리라. 나보다 뒤에 태어나 그 도 듣기가 나보다 앞이라면 내 그를 스승으로 삼으리라. 나는 도를 스승으로 삼으니 나보다 먼저 나고 늦게 남을 따지겠는가?
위와 같이 성숙한 사람은 ‘나이 듦’과 상관없이 선생이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2 ‘나이 듦’으로써 원로나 어르신으로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1의 예’는 천재적인 자질을 지닌 사람의 드문 경우이고 일반적으로 원로나 어르신으로 후배에게 대접을 받으려면 무엇보다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이 구절의 원래 뜻으로 보면 사회지도층(원로)에게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라는 도덕적 요구이자 명령이다. 이를 다른 나라의 사상에 우리 식의 의미로 해석하는 격의(格義)로 말한다면 '지갑을 열고, 입을 닫자'가 아닐까? 지갑은 책임의 실천이고 입 닫음은 젊은이의 자율을 존중하자는 의무다.
좀 더 고상하고 문학적인 표현을 하자면 원로란 '꽃이 아닌 거름'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원로란 다음에 다름이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갑을 열고 입을 닫자, 꽃이 아닌 거름이 되자.
3. 원로의 사상적인 밑거름 역할과 후배들의 사회적 실천
혁명의 상징인 프랑스대혁명에서 루소와 볼테르같은 원로 사상가들이 혁명의 후배들에게 사상의 밑거름을 제공했다. 다음은 볼테르의 격렬한 호소다!
오라, 용감한 디드로여, 대담한 달랑베르여, 단결하라…
광신자와 무뢰한을 타도하자. 하찮은 열변, 잔혹한 궤변, 거짓역사…
수많은 부조리를 때려 부수자!
지각 있는 자가 지각없는 자에게 복종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다음 세대들은 그들이 향유하는 이성과 자유에 대해 우리에게 감사하리라.
원로의 사상은 후배들이 이성과 자유를 향유하게끔 거름이 되어 혁명의 꽃을 맺게 했다.
4. 전봉준과 전태일 정신
녹두장군 전봉준은 봉건제를 타파하는 근대여명기에서 '갑오동학농민혁명'이란 위대한 역사의 거름을 남겼다.
대구 출신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남한자본주의가 시작할 무렵 자본주의의 천박한 본질을 꿰뚫고 “법을 준수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라”는 장엄한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은 후배들이 운동하는 노동현장에서 거름이 되었다.
5. 지금 필요한 원로의 역할
윤석열은 “계엄이 아니라 계몽이었다”고 장난질 치듯 어처구니없는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 '키세스단'은 천박한 무뢰한에 격분해 숭고한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있다.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원로는 키세스단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전봉준‧전태일 정신이 키세스단에서 꽃 피기 위하여 원로는 좋은 거름이 되어야 하리라! 노자 선생의 충고다.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 자신의 몸을 뒤에 두어도 그 몸은 도리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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