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하는 6개월 아기들도 안다, 남 돕는 사람이 더 좋다는 걸[BOOK]

2024-10-04

선악의 기원

폴 블룸 지음

최재천·김수진 옮김

21세기북스

종종 책을 분류하는 기준이 의아할 때가 있다. 『선악의 기원』은 심리학 실험들을 이야기하는데, 대형 서점들은 모두 인문서로 분류했다. 현명한 독자들은 착각하지 않겠지만, 자칫 지레짐작으로 실험과학자들의 깊은 생각과 교묘한 솜씨를 접할 기회를 놓칠까 노파심이 든다.

이런 염려는 지은이 폴 블룸의 탓도 약간 있다. 유명한 심리학자 겸 교양서 저자로서 다작인 편인데, 국내 출판된 다른 4종의 번역서와 그가 참여한 강연집들은 이 책보다 소위 ‘인문’인 사색과 이야기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블룸은 또 다른 수퍼스타 스티븐 핑커와 비슷하다.

핑커와 블룸은 여러모로 궤적이 겹친다. 두 사람 모두 캐나다 퀘벡 출신으로 미국 북동부에서 공부하고 연구자로서의 전성기를 보냈다. 실은 핑커의 가장 중요한 연구 업적으로도 거론되는 1990년 논문이 당시 20대 후반이던 블룸과의 공동 논문이다. 이들은 인간의 언어가 진화 과정에서 돌연 출연한 부산물이라는 당시의 주류 견해에 반하여 언어가 자연선택의 결과임을 주장했다. 이 논문을 계기로 언어가 진화의 직접 산물인지 아닌지에서 진화를 통해 어떻게 언어가 출현하는지로 연구방향이 바뀌었다고 한다.

『선악의 기원』은 블룸의 2007년 논문 '언어 발달 전 유아들의 사회적 평가'에서 자라 나왔다. 영유아 전문 실험심리학자인 부인 카렌 윈, 그녀의 대학원생 킬리 햄린이 같이 진행한 실험 연구인데 생후 6개월과 10개월의 영아들도 다른 사람을 매력적이거나 혐오스럽게 평가할 때 타인에 대한 그 사람의 행동을 고려한다는 증거를 잡았다. 영아들은 다른 사람을 방해하거나 중립적인 사람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을, 또 방해하는 사람보다는 중립적인 사람을 더 선호했다.

어느 정도 짐작되던 결과였지만, 그렇게나 어린 영아들에서도 그런 선호가 뚜렷이 드러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배밀이 시기 영아들에서도 도덕적 판단 경향이 나타난다면, 사람은 어떤 도덕감각을 후천적으로 학습한다기보다 어렴풋하나마 관련 감각과 성향을 타고난다는 결론을 택할 수밖에 없다. 또한 말 못하는 영아들을 대상으로 그런 복잡한 실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점도 혁신적이었다. 실험 방식을 응용할 용처도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은가? 말 못하는 영아에게 무슨 실험을 어떻게 했길래 그런 증거를 잡을 수 있었을까? 확보한 증거가 과연 제대로 결론으로 이어지는가? 혹시 관찰 내용을 실험자가 과도하게 확대해석한 것이 아닌가? 다른 실험으로 검증 가능할까?

다행히 심리학 실험들의 전체적 진행 과정 자체는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다. 까다로운 것은, 성급한 결론으로 비약하지 않도록 깊이 생각하고 교묘한 검증 실험을 구상하는 부분인데, 지은이는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1장에서 2007년 실험 이야기를 풀어내고, 아기들의 선의와 이기심, 성인의 도덕감정 등등에 관련된 실험 이야기들로 넘어간다. 시야도 넓어서, 이타심이 영유아 시기부터 발현되지만 도덕적 동기 없이 관습적으로 이타성이 발현되기도 함을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한두건의 실험으로 결론으로 비약하는 점을 경계하는 점이 좋다. 어린이들도 ‘같은 인종’을 선호하는 듯한 실험도 있지만, 달리 실험해보니 피부색보다는 억양을, 그것도 태내에서 많이 접촉했을 억양을 선호하더라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교훈적이다.

블룸이 개진하는 주장들이 달리 해석되는 날이 오더라도, 한 실험의 결과에 의거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주장을 검증하려면 어떤 실험을 더 해야 할 지 고심하고 궁리하는 모습은 변함없이 본받아야 할 자세다. 2015년의 첫 번역본 이후 이번에 새 번역본이 다시 나올 정도로 평가가 높은 데에는 아마도 이 점이 한몫하는 듯싶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