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자’가 살아남는다? ‘적합한 자’가 살아남은 것!

2024-11-27

‘늑대가 개로’ 가축화 과정엔 ‘서열 행동’ 주관 세로토닌, 추운 기후 원숭이에겐 ‘모성애’ 옥시토신 유전자 회로 더 활발

사냥문화가 지금의 두뇌 크기 갖게 하고, 농경문화가 ‘아밀라아제 유전자’ 복제수 많게 한 것도 유전자 메커니즘 일환일 뿐

그런 유전자를 지배한다는 건 가능할까? 지배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문명화된 생명체로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질문이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것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생물학 개체에는 ‘형질’이라 부르는 수많은 특성이 있다. 예컨대 인간에게는 키나 몸무게와 같은 신체지수, 피부색, 각종 생리학적 수치, 여러 질병들, 약물 반응성, 인지 기능, 사회성, 성격이나 성향 등 수없이 많은 형질들이 존재한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 모든 형질에 유전자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우리가 유전자가 만들어 낸 산물이며 유전자가 만든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이 결정론의 의미로, 즉 어떤 형질을 유전자가 100% 설명한다는 뜻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타고나는 유전자의 영향력은 형질마다 모두 다른데, 대개 100%에 미치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유전학적 영향력이 높은 키의 경우도 그 값이 80%다. 환경적 요소가 특히 중요할 것으로 생각되는 우울증의 유전학적 영향력은 30~50% 정도로 측정된다.

환원주의는 결정론과는 다른 개념이다. 모든 자연 현상은 개별 요소들로 환원 가능하기에, 자연과학은 환원주의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환원 불가능한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개별 요소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쨌든 유전자 결정론이란, 타고나는 유전자들의 영향력 총합이 100%에 가까울 때, 즉 유전학으로 완전히 환원 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유전자 결정론에 맞서 몇몇 학자들이 주목하는 요소는 바로 인간의 문화다.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문화 복제자 ‘밈(meme)’을 상정했다. 스스로 번식한다는 개념을 유전자로부터 빌려왔지만 엄밀히 보면 과학적 개념은 아니었다. 밈에는 물질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에 대한 물질적 근거를 찾고자 한 학자들의 노력을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에서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 만든 문화가 유전자의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이 이론의 요지다.

대표적으로 인간의 문화가 뇌의 진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가 있다. 우리가 어떻게 지금 정도의 두뇌 크기를 갖게 되었는지를 역추적한 것인데, 이에 따르면 뇌가 필요로 하는 대사 에너지의 90%가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 쓰였을 것으로 드러났다. 사냥이나 음식의 보관과 가공 기술 등을 학습하는 데 필요한 ‘생태학적 지능’이 생존에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기술은 도구를 사용해야 하고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문화적 학습을 소화할 만한 지능이 필요했던 것이다.

소화 및 대사와 관련된 유전자들도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침 속에는 녹말을 소화하는 효소인 아밀라아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아밀라아제 유전자 AMY1은 사람마다 복제수가 상당히 다르다. 적은 사람은 2개, 많은 경우 20개까지도 있다. 복제수가 많을수록 녹말의 소화에 유리하다. 전 세계 5000명이 넘는 사람의 유전체를 조사한 ‘네이처’ 논문을 보면, 동아시아, 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을 비롯한 농경 기반의 인류 집단이 높은 AMY1 복제수를 가지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낙농업이 발달한 유럽에서는 유당분해효소의 활성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 효소는 젖에 들어 있는 유당을 소화시키는 일을 한다. 우리가 아기일 때는 유당분해효소의 작용이 활발하지만, 젖을 떼고 나면 이 효소는 더 이상 생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당 내성 변이를 가지는 경우에는 성인이 되어서도 이 효소를 발현한다. ‘네이처’에 발표된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기근과 전염병이 만연하여 우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던 시기에 유당 내성 변이가 유럽 안에 빠르게 확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뜻 생각하면 인간의 문화가 유전자의 진화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모든 사례는 우리가 여전히 자연선택이라는 진화 메커니즘에 종속되어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문화라는 또 다른 환경적 요소가 자연환경 위에 덧붙여진 것뿐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두뇌의 크기에 관한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 일부 상대적으로 높은 생태학적 지능을 가진 개체들이 있다. 물론 이들의 지능은 우연히 타고난 유전자로 인한 것이다. 이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요령을 습득하고 때로는 도구를 개발하기도 한다. 이제 이 집단은 이러한 기술을 학습할 만한 지능을 가진 개체와 그렇지 못한 개체로 나뉜다. 결국 더 높은 지능을 유발하는 유전자만 살아남게 된다. 기술, 도구, 학습이라는 문화적 요소들이 자연환경 위에 또 하나의 생존 장벽을 만든 것이다. 아밀라아제와 유당분해효소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이기적 유전자’에 문화적으로 맞설 가능성을 모색하는 또 다른 흐름은 인간의 사회성에 초점을 맞춘다. 한국에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책 가 그런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을 뒤틀어 흥미를 유발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가장 다정한 자(the friendliest)’가 ‘가장 적합한 자(the fittest)’를 대체했을 뿐, 저자들이 부정하고 싶었던 적자생존의 논리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회적 유전자’가 ‘이기적 유전자’의 자리를 차지한 것뿐이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사회적 유전자’들은 세로토닌과 옥시토신 활성에 관여한다. 세로토닌의 활성은 늑대가 개로 가축화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지목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인간도 이와 유사한 경로를 거쳐 ‘자기 가축화’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세로토닌이 인간의 공격성을 줄이고 친화력을 증대시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로토닌의 활성이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하게 작동했다는 여러 연구 결과들이 있다.

그런데 세로토닌은 사회적 서열 행동을 주관하는 호르몬이다. 예를 들어, 높은 지위의 원숭이들은 세로토닌이 높다. 계급이 낮은 곳에서 높아지면 세로토닌도 증가한다. 지위가 낮은 원숭이들에게 세로토닌 수치를 올리는 약을 투여하면? 고분고분하던 원숭이들이 지배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세로토닌을 활성화하는 이 약은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쓰인다. 세로토닌 부족이 일으키는 부작용 중 하나가 우울증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진화적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서열이 낮은 상태에서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보호 작용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다. 이렇게 보면, 다정한 것이 살아남은 진화 역사의 이면에는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는 현대인들의 비극이 있다.

세로토닌의 또 다른 이면은 편도체와의 연관성이다. 세로토닌 활성이 높을수록 편도체가 발달한다는 여러 연구 결과들이 있다. 편도체는 공포와 불안의 감정을 주관하는 뇌 기관으로서 특히 혐오 반응을 일으킨다. 실제로 세로토닌이 편도체 내의 불안-공포 신경회로를 작동시킨다는 사실이 보고되기도 했다. 이는 개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에도 드러난다. 개들은 주인에게는 순종적이지만 미지의 외부인에 대해서는 강한 경계심을 보인다. 사람도 비슷하다. 소위 사회생활 잘하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 집단 밖의 타인들에게는 배타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혐오는 지난 글 ‘똥과 두려움의 상관관계’와 ‘비만과 동성애의 공통점’에서 다룬 바 있다. 그것은 감염 가능성이 있는 대상에 대한 회피 행동을 통하여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개체를 보호하는 선제적인 대응 기작이다. 다른 인종이나 집단, 사회 속 소수자들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으로 발휘되는 생존 전략이다.

따라서 세로토닌이 높은 인간이 잘 살아남은 것은 다정한 친화력 때문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사회적 서열 행동 그리고 혐오를 통한 감염 회피 기작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로토닌의 영향이 사회적 친화력을 통해서 작용했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더 희망적인 사실은 아니다. 세로토닌의 활성은 유전자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는 다정하고 싶어도 다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성마저 유전학적인 능력이라는 사실은 옥시토신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옥시토신은 모성애 호르몬이라고 불린다. 출산 시 자궁 수축을 유도해 분만을 돕고, 수유 시에는 아기의 젖 빨기에 반응해 모유의 분비를 도우며, 어미로 하여금 아기의 울음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옥시토신의 진화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가 ‘사이언스’에 발표되었다. 연구진은 다양한 서식지에 분포해 있는 원숭이 48종의 유전체를 생태환경과 연계해 분석했다. 흥미롭게도 추운 기후에 사는 원숭이들의 옥시토신 유전자 회로가 더욱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척박한 환경에 사는 개체들일수록 성공적으로 자손을 남기기 위해서는 더 오래 수유를 하고 새끼를 더 많이 돌보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유전적으로 옥시토신 호르몬의 도움을 받은 어미의 새끼들이 더 잘 살아남은 것이다. 아마도 옥시토신 덕분에 이 원숭이들은 더 발달된 사회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인간의 문화에서 모성애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심지어 현대 사회에서도 좋은 엄마, 훌륭한 엄마라면 수술보다는 자연 분만으로 아이를 낳고 분유보다는 모유로 아이를 키울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실상은 이러한 모성애마저 유전자의 활성에 의해 결정되며 진화 과정에서 선택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생물학의 증언이다. 누군가는 좋은 엄마이고 싶어도 단지 호르몬의 부족으로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전자의 힘에 문화로 대항하고자 했던 지금까지의 시도는 만족스럽지 않다.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들어 낸 문화마저 결국 자연선택에 의한 유전자의 진화로 귀결되는 허무한 사례들이다. 문화가 유전자에 흡수되는 현상이다. 반면 ‘사회적 유전자’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자연선택에 대한 문화적 숭배로 변질된다.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유전자에서 도덕적 규범을 도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문화 속으로 침투하는 현상이다. 결과적으로 두 방향성 모두 우리를 유전자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렇게 유전자에 종속된 문화가 아니다. 유전자는 분명 우리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지배한다. 그것들의 의도, 정확히는 그것들이 만든 법칙에 따라 우리를 ‘움직이게끔’ 한다. 물론 우리 인간은 유전자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항에서 더 나아가 이 관계를 전복하고 우리가 유전자를 지배할 수는 없을까? ‘유전자가 지배하는 사회’를 ‘유전자를 지배하는 사회’로 뒤바꿀 수는 없을까? 그러나 생명도 의식도 없는 물질에 불과한 유전자를 지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이런 것들이야말로 문명화된 생명체로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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