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둥이 나온 산부인과 없애는 게 내 역할…마음 바꿨다”

2025-02-21

73년 맞은 부산 일신기독병원 홍경민 병원장

이젠 ‘도휘 엄마’다. 이혜람(37)씨는 “내 이름이든 ‘새댁’이든 뭐라고 불러도 좋지만, 그래도 ‘도휘 엄마’가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아요”라며 아이를 더 깊이 품었다. 지난 19일. 이씨는 아들 도휘를 안고 부산 일신기독병원으로 향했다. “백신 맞으러 왔어요. 여기는 도휘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요.” 도휘는 이 병원의 30만 번째 신생아. 이름도 채 짓지 않은 상태에서 ‘일신기독병원 30만둥이’로 곳곳에 알려졌다.

네쌍둥이 엄마. 1980년. 당시 25세였던 임신 7개월 백연순(70)씨는 배 속의 아이를 ‘지우려고’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 삶이 힘겨웠고, 세상이 무서웠다. 당시 일신기독병원에서는 “현재 상태로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아랫배를 가르고 낳았다. “요것들아, 그렇게 다 살아난 거야”라고 하면 올해 45세 된 네쌍둥이 딸들은 “엄마, 그 얘기 좀 그만해. ‘라떼(“나 때는…”하며 이어지는 하소연 또는 훈계)’라고요”라며 웃는단다.

홍경민(55) 일신기독병원장도 그 얘기를 듣고 웃는다. “73년 된 우리 병원에서 3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안고 세상을 만났죠. 그런데 숫자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야 하고, 산과(産科)는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홍 원장을 지난 20일 원장실에서 만났다. 소아청소년과 앞에는 도휘의 ‘동문 선배’ 50여 명이 엄마 가슴에 안기거나, 등에 업혀 있었다. 한때 서로 ‘홀몸’이 아니었던 것처럼.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네. 대부분 그렇습니다. 어제(지난 19일)까지 30만101명이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산 16개 구·군 중 인구 30만 명을 넘는 곳이 부산진구(지난달 기준 36만 명)와 해운대구(38만 명)입니다. 사하구 29만 명과 맞먹는 수입니다. 동문회를 열어도 큰 동문회입니다(웃음).”

병원 동문들 지난달 모여 축하 자리

2000년대 여성전문병원이 쑥쑥 생기기 전, 부산 신생아 10명 중 2명은 이 병원 출신. 부산에 사는 사진기자가 “우리 애들 셋도 다 여기서 태어났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백연순씨의 네쌍둥이는 그 통계에 들어가지 못할 뻔했다. 백씨는 기자에게 “시어머니 눈치 보다가 병원도 못 갔어. 배가 하도 불러 이상해서 임신 6개월 만에 처음 병원에 갔는데, 그제야 쌍둥이로 알았고, 그래도 이상해서 일신기독병원에 갔는데, 셋이라고 하더라”며 “그런데 병원에서 밑에 뭔가 살짝 보여 X-레이를 다시 찍자고 해서 봤더니 넷이었다”고 말했다. 백씨는 막막했다. 어떻게 살지, 하고. 유산을 생각했다. 병원에서 안 된다고 했다. “지금 손주만 여섯인데, 명절만 되면 시끌벅적 재밌다. 내가 그때 무식했어”라며 크게 웃었다. 일신기독병원의 뿌리는 기독교 선교회다. 홍 원장에게 물어봤다.

임신중절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백연순씨 경우는 8개월로 접어드는 상태라, 당시 병원에서는 최대한 배 속에서 자라도록 한 뒤 제왕절개를 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백연순씨의 네쌍둥이 딸 중 셋째, 넷째는 결혼 후 경기도 안산에 산다. 일신기독병원까지 와서 각각 두 명씩 낳았다. 대를 잇는 출산이자 원정출산이다. 아들-딸-딸 이렇게 자자손손 3대 출산도 있다. ‘의령 10남매’를 키우고 있는 박성용(51)씨 부부도 이 병원에서 셋째부터 아홉째까지 일곱 명을 낳았다. 박씨는 “열째까지 출산하려 했지만, 다운증후군 판정을 받아 다른 병원에서 낳았다”고 했다. 의령 10남매는 지난달 18일 일신기독병원에서 열린 ‘30만둥이 출생 기념식’에서 밴드로 참석했다. 홍 원장은 “아주 분위기를 붕 띄웠다”며 다시 웃었다.

20만둥이에서 30만둥이가 되기까지 무려 3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 병원 10만둥이가 1982년, 20만둥이는 1994년, 30만둥이는 지난해였죠. 각각 12년, 30년의 간격입니다. 20만둥이가 태어나던 해, 병원에서는 평균 1만500여 명의 생명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하루 평균 29명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2명 수준입니다. 이 추세라면 159년 뒤에야 40만둥이를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20만둥이가 태어난 1990년대 중반은 한 해 출생아 수가 70만 명을 넘어섰다. 그 이후로 내리막길. 지난해는 2023년 23만여 명에서 그나마 3.1% 늘어난 24만여 명이다.

(40만둥이까지의) 159년을 줄이는 게 목표인지요.

“현재 출산율이 다소 높아지고 있어 희망을 걸어 봅니다만 그게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의 사명은 생명이지 숫자가 아닙니다. 제가 병원장이 된 지난해 7월, 본원 산과를 축소한 뒤 없애는 게 저의 첫 번째 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추세라면 40만둥이는 159년 뒤”

잠시만요. 일신기독병원은 산부인과가 주요 진료과목인데요. 2022년 '부산 미래 유산'으로 선정된 이유도 산부인과 아닙니까. 없앤다니요.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산부인과는 ‘돈’이 안 됩니다. 진작부터 합계출산율이 떨어지면서 경영은 위기였습니다. 지난해는 그나마 소폭 늘어난 0.75로 전망하는데, 저희는 그 두 배인 1.56명은 돼야 (산과가) 유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신생아 중환자실(NICU)은 산모와 신생아 2명을 살펴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고령 산모가 많아지면서 분만 사고 위험성이 커지기도 했고요. 일할 사람을 붙들어 놓고, 의료분쟁 소송을 헤쳐 나가려면 돈이 들 수밖에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뒤 ‘병원 불매 운동’이 벌어지면 문 닫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안정된 시스템이 갖춰졌는데도 폐업한다면 지역과 국가의 손실입니다.”

산과 전문의 사이에서는 “사고 날까 봐 애 받기가 겁난다”고 할 정도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불가항력적인 분만사고에 대해서는 국가 보상금 한도를 3000만원에서 3억원으로 올렸다. 최근에는 이를 10억원으로 다시 올린다는 의료안전망 강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분만 수술 수가(건강보험으로 지급되는 진료비)가 적은 것도 병원으로서는 부담이다. 자연분만 1건당 300만 원 안팎인 일본의 절반 수준이다.

2010년대 전국 분만 건수 1위이자 40여년간 17만9000명이 태어난 경기도 성남의 곽여성병원이 지난해 문 닫은 건 산부인과의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신기독병원도 저출산과 분만 위험, 낮은 수가라는 3대 충격파를 피하지 못했다. 지난해 상반기, 본원 포함 총 4곳의 병원 중 3곳에 있던 산부인과 2곳을 정리했다 부인과만 남기고 산과는 없앤 것. 홍 원장은 “의사이자 경영자인 제가, 본원도 산과를 없앨지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결론은요.

“유지도 아니고, 더 잘 키우자로 급선회했습니다.”

어떤 이유입니까.

“저희는 빚이 많습니다. 그리고 큽니다. 갚아야 합니다. 갚지 않으면 빚이 죄가 될 것 같습니다.”

빚이요?

“호주 선교사로 온 매혜란·혜영 자매가 이 병원을 설립한 게 1952년 6·25 전쟁 와중이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우리 병원을 찾은 60%의 임산부는 무료로 진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3000명 가까운 조산사를 키웠습니다. 우리나라 산과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우리 병원이 30만둥이 어머니인 이혜람씨나 네쌍둥이 어머니 백연순씨 같은 내국인은 물론, 매씨 자매가 외국인인 우리에게 그랬듯 우리도 외국인에게도 봉사할 수 있게 해야죠. 쉬운 길은 아니겠지만요. 우리 병원 이름이 된 ‘날마다 새롭게(日新)’라는 성경 말씀처럼 계속 나아가야죠.”

홍 원장은 병원의 ‘시그니처’ 같은 산과·소아과를 잘 키우기 위해 내과·외과·정형외과 등 ‘성인 진료’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병원을 다시 일으키려는 와중에 곧 ‘30만둥이’가 태어날 것이라 봤고, 어떻게든 출산율을 조금이라도 올릴 기회다 싶었다”며 “지난달 18일 기념식은 그야말로 산고(産苦) 끝에 나온 기쁨”이라고 밝혔다.

이혜람씨는 지난해 12월 17일 진통 끝에 분만실로 들어갔다. 어렴풋이, 간호사가 속삭이듯 말했단다. “아무래도 ‘곤이(도휘의 태아명)’가 우리 병원 30만둥이가 될 것 같은데요?” 깨어나고 하루 뒤. 의료진에 둘러싸여 팔로, 손가락으로 갖가지 하트 모양의 축하 세례를 받았다. 이씨는 “제가 고마운데, 병원에서 고맙다며 8세까지 의료 서비스를 주기로 했고요. 음 …. 이건 말해도 되나 ….” 한 원장에게 물어봤다. “아, 그거요? 우리 병원 선배님부터 74년째 이어진 사랑과 헌신, 그리고 믿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며 다시 웃었다.

병원에 절실한 게 무엇인가요.

“병원이 아니라 나라에 절실한 건 아이들입니다. 시끌벅적, 왁자지껄. 아이들이 곧 기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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