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화랑 주인…김창열이 전시 열어 도왔다

2025-12-05

예술가와 친구들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분명히 우리 곁에서 함께 숨 쉬며 살았었는데, 아련한 전설로만 남아 있는 사람. 명동화랑 대표 김문호(1930~1982)가 딱 그런 사람이다. 1970년 12월, 김문호는 과감하게 현대미술 작가들을 지원하는 화랑을 개관했다. 명동성당 건너편 건설빌딩 반지하의 198㎡(60평) 규모였다. 지금과는 달리 대중들의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던 때였다.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간 결단이었다.

조각가 권진규 전시회 열어 작품세계 알려

당시 서울 시내 화랑들은 천정이 낮고 기껏해야 면적이 66㎡(20평) 이하로 좁았다. 100호 크기를 걸면 그림이 너무 크게 보일 정도로 빈약한 공간 일색이었다. 100호 이상의 대형 작업을 제작하는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걸만한 공간이 절실했다. 명동화랑의 넓은 공간은 혈기왕성한 현대미술 작가들의 고충을 해결해주었다. 작가들은 환호했다. 환호의 메아리가 김문호에게는 삶의 궁핍으로 되돌아왔다.

김문호는 선대부터 개성에서 살아왔다. 재산가 집안이었다. 개성에서 태어나 자란 김문호는 송도중고를 다녔다. 한국전쟁 때 남하하여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부친은 고서화에 식견이 높았고 미술품 수집에도 열심이었다. 개성의 청풍 김씨 하면 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집으로 알려졌다.

가족을 이끌고 남으로 온 부친은 서울에서 중앙석유주식회사를 경영했다. 부친은 아들에게 지인인 인천부시장의 딸인, 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4학년생인 박임순과 선을 보게 했다. 박임순의 졸업과 함께 두 사람은 결혼했다. 김문호는 중앙석유주식회사에서 일했다. 이 무렵 그는 일본 등지에서 발행된 미술 서적을 다량 구입하여 탐독하였다. 현대미술에 눈을 떴다. 그리고 명동화랑을 열었다.

김문호는 화가, 조각가들은 물론 미술평론가들과도 친했다. 명륜동에서 살다가 명동화랑을 경영한 이후에는 우이동에 터를 잡았다. 우이동 집 근처에는 화가 박생광·원석연이 살았다. 평론가 이일·유준상·오광수가 우이동으로 먼 걸음을 하곤 했다.

미남자 김문호는 다양한 취미를 가진 멋쟁이였다. 클래식 음악에 정통하여 음악전문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한국을 방한한 외국 교향악단의 음악 공연에는 빠지지 않았다. 가족을 데리고 세종문화회관을 자주 찾았다. 공군 장교로 근무할 때 미군들과 교류하며 골프를 배웠다. 승마·수영·기계체조도 잘했다.

명동화랑이 개관해서 폐관하기까지 현대미술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경영 부진에 빠진 명동화랑은 명동을 떠나 충무로의 좁은 공간으로 옮겼다. 충무로에서 다시 종로경찰서 맞은편 해영빌딩 지하로 갔다. 이 공간은 제법 넓었다. 별로 할 일이 없는 조각가 권진규(1922~1973)가 자주 오가며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문호와 권진규는 무척이나 가까웠다. 명동화랑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권진규의 전시회를 세 번이나 열었다. 화단의 아웃사이더였던 권진규는 명동화랑의 전시를 통해서 비로소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이 공간에서는 흥미로운 전시가 많이 열렸다. 1972년 8월, 김문호와 무척 가까웠던 이우환의 특이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넓은 나무판에 붓으로 점을 그려나가는 대신 자귀로 찍어내려 수많은 점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1973년 6월, 이강소의 선술집 퍼포먼스가 열렸다. 화랑 전시공간에 아예 술집을 차렸다. 관객들은 와서 막걸리를 마셨다. 대중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전시들이 이어졌다. 화랑의 경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1974년, 김문호는 미술잡지 계간 ‘현대미술’을 펴냈다. 이일·이우환·이세득·오광수·김인환·이경성·조요한·정병관·김방옥 등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발행인 김문호, 편집인 유준상의 이 미술잡지는 창간호가 곧 폐간호가 되었다. 그리고 화랑이 문을 닫으면서 해영빌딩 시절은 끝나버렸다.

일본 전시 계기로 단색화 얼개 만들어져

1975년 7월 비원 옆 공간사랑에서 ‘명동화랑 40인전’이 열렸다. 화랑이 문을 닫은 지 7개월 만에 미술인들이 뜻을 모아 명동화랑의 재기를 기원하며 열린 전시회였다. 권영우·김기창·서세옥·송영방·민경갑·정환섭·이종상(이상 동양화), 권옥연·남관·박고석·박서보·최영림·정창섭·홍종명(이상 서양화), 김찬식·박석원·심문섭·이종각·최기원·최종태(이상 조각), 김구림·김상유·김종학·송번수·유강렬·윤명로(이상 판화) 등이 출품했다.

그해 명동화랑·현대화랑·조선화랑·동산방화랑·양지화랑 등이 모여 한국화랑협회를 결성했다. 김문호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명동화랑 40인전’ 이후 명동화랑은 인사동 길에서 안국동 로터리 못 미쳐 오른쪽 있는 건물의 2층 공간에서 재출발했다. 1976년 2월, 명동화랑 재개관전이 열렸다.

1976년 5월 물방울 화가로 잘 알려진 파리 거주 김창열의 전시회가 현대화랑에서 열렸다. 완판을 했다. 김창열은 자신의 그림이 다 팔렸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김창열 등 당시의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은 김문호에게 부채 의식이 있었다. 김창열은 현대화랑 박명자 대표에게 양해를 구했다. 한국의 최첨단 현대미술을 이끌었으나 경영이 부진하여 형편이 어려워진 명동화랑 김문호를 도울 일은 물방울 그림으로 전시회를 여는 일 말고는 없었다. 유화는 제작 시간이 오래 걸린다. 급히 종이에 수채화로 그림을 그렸다. 6월 14일 명동화랑에서 김창열 드로잉전이 열렸다. 이날 김구림 등 동료작가들이 모였다. 김창열의 뜨거운 담뱃재가 초등학교 2학년생인 김문호의 막내아들 김재준의 눈으로 휙 날아갔다. 소동이 일어났다. 다행히 크게 화상은 입지 않았다. 놀란 김창열은 그날로 담배를 끊었다. 전시는 대성공이었다. 김문호는 처음으로 그림을 팔아서 큰돈을 만져 보았다. 동료 미술작가들에 대해 궁핍을 감수하면서까지 의리를 지켰던 김문호에게 김창열은 도리를 지켰다.

이 무렵 일본에서 돌아온 김구림은 김문호와 사이가 각별해졌다. 김구림은 1976년 4월 과슈 작품으로 명동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김구림의 과슈 작품과 판화작품은 인기가 있었다. 과슈 작품은 인사동 술집에, 판화작품은 한남동 ‘가을’에 맡겨놓고 그걸로 김문호·오광수 등이 술을 마셨다.

김문호는 일본의 동경화랑과 가까웠다. 현대미술 화랑으로 잘 알려진 동경화랑의 대표 야마모토는 다카시(1920~1988)는 원래 골동품을 취급했다. 한국목기를 일본에 소개했다. 김문호도 골동을 취급했다. 김문호와 야마모토는 가까웠다. 동경화랑과 함께 ‘이조 민화전’을 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한국현대미술의 일본진출로 이어졌다.

1975년 동경화랑에서 열린 ‘다섯 가지의 흰색전’을 계기로 한국현대미술의 큰 흐름이 되는 단색화의 얼개가 만들어졌다. 이 전시는 김문호와 야마모토의 꾸준한 교류가 가져준 또 다른 결실이다. 김문호는 이일과 박서보를 존중했다. 이일·박서보와 친했던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이일과 함께 이 전시의 평문을 썼다. 부침을 거듭하던 명동화랑은 1980년 4월, 관훈동 관훈미술관 별관에서 재개관했다.

부인은 생활이 힘들어도 김문호가 좋아하는 개성식 손만두를 빗고 보쌈김치를 담그는 일을 잊지 않았다. 부인 대신 장을 보거나 부인이 먼저 잠들면 요를 한쪽으로 살살 밀어가며 방의 먼지를 닦아내는 등 깔끔하면서도 자상한 남편이었다.

1982년 4월 28일, 평소처럼 퇴근한 김문호는 다음날 새벽, 거실에서 각혈과 함께 쓰러졌다. 박서보·하종현·윤형근·김구림·배륭·김기린·박생광·송수남·변시지의 그림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날 서울대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참된 동반자이길 바랐다. 내 향토의 동심에 한 방울 모빌 오일이 되려고 한 기원은 마침내 끝 매듭을 못하고 - 패지(敗地)에 뒹굴어 떨어졌다.”(김문호의 묘비명) 그의 자필 메모가 묘비명이 되었다. 과연 그런가? 김문호의 정신은 생생하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내일도 살아있을 것이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