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도를 달리다 보니 수확이 끝난 들녘이 펼쳐진다. 허허벌판이라 고즈넉하기만 하다. 올해 봄부터 기온이 슬슬 오르기 시작해 여름에는 심한 불볕더위를 겪었고, 가을은 계절답지 않게 계속되는 늦더위로 사상 유례없는 무더위를 기록한 데다 초가을에는 장마까지 몰아친, 치열했을 시간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상기후에 작물들이 살아남고자 몸부림쳤을 것을 생각하니 잔잔한 들녘이 마치 전쟁터처럼 보였다. 이상기후가 앞으로 우리 농사 판도를 어찌 바꾸어 놓을지 우려가 된다.
이상기후는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자재인 종자 생산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우선 날씨가 고온이나 강우량 등의 요인으로 변죽을 울리면 농사의 근원인 종자 생존과 발아, 생장, 분포에 영향을 끼친다. 평균 이상으로 날씨가 더워지거나 저온 현상이 계속되면 종자의 발아력은 현저히 낮아진다. 또한, 가뭄으로 계속 물이 부족하면 종자는 활력을 상실한다. 불규칙적으로 비가 오락가락하면 발아할 때 생리적 혼란을 일으켜 종자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이상기후는 종자 휴면 등 생리에도 영향을 준다. 기온이 오르면 종자의 휴면기간은 단축되거나 발아 시점이 변한다. 기본적으로 일부 식물은 휴면에서 깨어나기 위해 저온이나 특정 환경 자극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상기후가 계속되면 휴면에서 깨어나기 위한 적정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아 발아가 억제된다.
종자 품질이나 생존율도 변할 수밖에 없다. 초고온, 건조한 환경은 종자 발아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종자의 수명을 짧게 만든다. 야생에서는 이상기후가 종자 은닉 패턴은 물론, 식물의 생육지 경계 변화, 종자의 분산, 새로운 서식지에서의 발아 성공 여부 등에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고산지대나 극지방으로 종 분포가 이동하거나 심각하게는 기존 생태계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 또한, 종자는 미생물, 곤충, 동물과 상호작용하는데, 이상기후로 이들의 상호작용이 교란되면서 종자 발아와 분포에도 악영향을 준다.
데이터브릿지 마켓 리서치에 따르면 현재 글로벌 종자 시장 규모는 2023년 약 572억 2천만 달러(한화 815조 6,000억 원)로 평가된다. 2031년에는 그 규모가 약 1,043억 5천만 달러(한화 1,487조 2,000억 원)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종자는 인류의 식량 공급원이며, 식물유전자원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지구 생태계의 회복력을 증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인류의 젖줄’이라 할 만큼 소중한 자원이다. 따라서 종자의 안전한 보존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원천적인 힘이며 생태계를 보전해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키우는 일이다. 국가적으로 무척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현재 대다수 국내 농가는 종자를 상업적으로 구매해서 농사를 지어 종자 보존을 간과할 수 있겠으나 보통은 농가 규모, 토종 등 작물 종류 그리고 농업 방식 등에 따라 자가채종 방식으로 받은 종자를 다음해 혹은 수년간 보관하였다가 사용한다.
그런데 어떤 농가에서 수확해 가지고 있는 열무 종자를 봄에 뿌렸는데 무가 크지는 않고 대만 길게 올라오더니 꽃이 피어 버려서 모두 갈아엎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종자를 잘못 보관해서 벌어진 일이다.
종자 보존 조건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종자를 보존하는 주요 환경요인은 온도, 습도, 밀폐, 빛 차단 등으로 기준에 따라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농가에서 완벽한 저장환경을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국내 종자 기업조차도 종자저장 시설이 작거나 없는 경우가 많아 유전자원이 소실될 우려가 크다.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는 2008년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세계작물다양성재단(GCDT)에서 ‘세계종자안전중복보존소’로 지정된 후 현재까지 국내외 식물 종자 11만 4,000자원을 안전보존 중인 국제 공인 시설을 구축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국내 종자업체 육성, 지원하고 국내 종자 기업이 보유 중인 식물 종자, 육종 소재 등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국내 종자 기업을 대상으로 안전보존서비스 설명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후 여러 국내 종자 기업에서 안전보존을 희망하고 있다.
농업유전자원센터는 우선 국내 토종자원을 보존하고 있는 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와 협약을 맺고 토종자원 보존지원을 약속했다. 협약에 따라 앞으로 기후변화나 인재에 따른 토종자원의 소실을 방지하기 위해 저장고에 10여 년간 자원을 보존하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는 수많은 식물상을 변화시키거나 위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식물은 이상기후에 적응하여 새로운 발아 메커니즘을 만들거나 종자의 발아 환경 조건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것이 지구상의 생물들이 펼치는 생존전략이며, 진화의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적응 속도가 기후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멸종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이상기후 상황에서 격변의 과정을 완화하고 식물 종자의 종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종자은행을 운영하며 식물 종자를 보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한 중요한 실천과제라고 본다.
남성희<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 농업연구관>
저작권자 © 전북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